喪中에도 어진모사 神筆 불태워
喪中에도 어진모사 神筆 불태워
  • 하대성기자
  • 승인 2011.10.30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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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칠곡부사와 부친별세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의 꽃을 피운 어진화사. 민족정기와 충의정신을 목숨처럼 아꼈던 작가. 상업미술 효시인 공방을 최초로 운영한 프로 화가. 이는 전북출신 어진화가 석강 채용신(1850-1941)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채용신 탄생 160주년, 서거 70주년을 맞은 2011년. 우리는 왜 이 시대에 채용신을 주목해야 하는가. 조선정신에 오롯이 마지막 정점을 찍었던 화가로서의 면모, 사진속에 함몰된 고유의 미학적 전범들, 그가 도달한 전통 초상화의 지평이 사라져 버렸다. 진정한 조선의 혼과 정신을 지독하게 고집한 채용신. 일제,미군정,현대라는 시대 흐름속에서 우리는 그 전통성을 잃어버렸다. 숭고한 정신을 되찾고 예술혼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때다. 채용신이 추구하고 이룩한 가치가 너무나 크고 고귀하다.
  그가 일군 화력(畵力)과 시대정신을 좇아 90평생의 여정을 겸허히 따라가 본다. 루트는 탯자리인 서울 삼청동에서 유택(幽宅)인 익산 왕궁 장암리까지. 채용신의 후손과 전문가, 향토사학자, 지역원로들이 함께 했다.

▲ 칠곡도호부사가 있었던 가산산성.

 <16>칠곡도호부사와 부친별세   

채용신이 어진을 그리고 그 공훈으로 제수받은 칠곡도호부사. 도호부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이다. 칠곡에 온 채용신은 도호부,향교 등을 초도순시했다. 취재진은 칠곡도호부가 있는 가산산성(架山山城)으로 향했다. 가산산성은 우리나라 산성으로 유일하게 삼중성으로 돼 있다. 산 정상에 내성,중턱엔 중성,하단에 외성으로 쌓아졌다.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 “도내에는 가히 지킬만한 성이 없는데, 오직 칠곡부의 성곽만은 만길 높은 산위에 남북대로를 깍은듯 서 있어, 거대한 방어 요새이다”라고 기술했다. 그야말로 영남제일관방(嶺南第一關防)이다. 칠곡도호부사가 있었던 자리으로 추정되는 중문부근은 녹음이 우거지고 지형이 바뀌어서 분간 할 수가 없었다. 문지와 성벽 유구는 남아 있으며 내성의 서쪽벽은 온전한 편이였다.

▲ 공차기는 하는 칠곡초등학생들.
취재진은 다시 대구 북구 읍내동(邑內洞)으로 갔다. 칠곡도호부 관아가 있던 읍내는 예전에 칠곡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 편입됐다. 관아 터는 현재 칠곡초등학교 테니스장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곡군청은 1014년 왜관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고 칠곡초등학교 백년탑에 기록돼 있었다. 읍내동에는 칠곡향교도 있다. 채용신은 이곳 관아에서 군정을 봤다.
 

▲ 칠곡도호부 관아가 있었던 기록된 칠곡초등학교 백년탑.

#뜻밖의 비보에 정신이 혼미

칠곡관아에 있던 채용신에게 어느 날 급보가 날아들었다. ‘부친 권영 위독.’ 부임한지 석 달이 못돼 접한 비보였다. 칠곡부사로 발령받던 날 그렇게 좋아하셨던 아버님이, 칠순을 넘겼지만 보기보다 정정했었는데……. 전갈을 받은 채용신은 순간 정신이 혼미했다. 내 그림을 그토록 자상하게 봐주고 관심을 보였던 아버님이, 호롱불 아래서 그림 그릴 때 옆에서 안료를 섞어주고 먹을 갈아 주었던 아버님이, 마당 한켠에 솥단지를 걸고 아교도 끓여주었던 아버님이……. 채용신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리곤 남이 볼세라 뒤돌아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채용신은 행장을 챙겼다. 익산 왕궁으로 말을 달렸다. 추풍령을 넘고 영동,금산,논산을 거치면 여산,왕궁이다. 칠곡을 출발해 달린지 사흘 후 먼동이 틀 무렵 왕궁에 도착했다. 아버님의 병은 생각보다 깊었다. 기력이 쇠진해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든 표정이었다. 채용신은 밤낮없이 회복을 고대했다. 아니 좀 더 사시길 바랐다. 그동안 못 다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채용신의 허나 극진한 간병도 허사였다. 아버님은 73세 일기로 생명줄을 놓았다.
이때 사정은 평생도 제6폭 신연도(新延圖)의 제기(題記)에 잘 나타나 있다.
 

#선원전 칠실에 원인모를 화재
1900년 8월 20일. 선원전(璿源殿) 칠실(七室)이 원인 모를 불이 났다. 이 불로 태조 어진을 비롯한 칠조(七祖) 영정 모두를 태워버렸다. 어진이 봉안된 지 불과 몇 달 안 되는데 끔직한 화마가 덮쳤다.

채용신은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어진모사의 명을 받았다. 그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사 제작에 임해 9월 26일 태조어진 2본을 완성했다.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도 이 해 12월 7일에 끝마쳤다.

▲ 채용신 평생도의 제6폭 <신연도>
어진(御眞) 모사 과정을 지켜봤던 고종은 채용신의 탁월한 화재(畵才)를 인정했다. 내년에 다시 입궐 자신의 어진을 모사하도록 고종은 명하였다. 채용신은 잠시 낙향하였다가 1901년 정월 재차 도성(都城)에 올라와 고종어진 도사했다.

1901년 3월 21일 조정 궁내부 내장원으로부터 훈령(訓令) 제1호가 내려왔다. “칠곡군 매원시(梅院市) 포사주인 박극이의 고소에 의하면, ‘포사를 수년 간 영업하면서 세금도 장정에 따라 납부하였는데, 전관(前官)의 체귀(遞歸 벼슬을 내놓고 돌아옴)전에 군리(郡吏) 이남극이 뇌물을 써 관련(官力)을 빙자하여 박극이를 가두고 포사를 탈취했다’고 하니, 즉시 이남극의 죄를 다스리고, 박극이를 포사주인으로 복구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채용신은 첫 훈령를 말끔하게 처리하고 그 결과를 내장원경임사서리도지부협판 이용익에게 보고했다.

#기막힌 실수 예술혼 더 빚나

일화 한토막.
고종은 왼쪽 수염 옆에 작은 사마귀가 있었다. 이를 민망하게 여긴 각료들은 채용신에게 그것을 그리지 말라고 일렀다. 고종의 초상화가 마무리될 때였다. 각료들이 둘러보고 있는데 채용신이 마지막으로 수염을 손질한 뒤 너무 긴장한 탓으로 그만 붓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붓끝이 사마귀가 있는 제 자리에 정확히 찍혔다. 명을 어겨 채용신은 황공하여 엎드려 떨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분위기가 싸늘하지 않았다. 수염 옆에 사마귀가 찍힘으로서 비로소 용안의 미소가 살아나 그림이 훨씬 돋보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채용신은 신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천재의 기막힌 실수가 예술혼을 더 빚냈던 것이다.

고종은 이어 기로소(耆老所) 당상(堂上) 삼승상(三丞相) 13정경(正卿)의 영정을 모사하도록 명했다. 모두 핍진(逼眞)한 경지에 이르러 고종은 16본의 주인공을 모두 알아 맞췄다.
채용신은 그 공로로 특별히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상중(喪中)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오래 머물렀던 것 같지는 않다.
1904년 가을 부친 거상(父親 居常)이 끝남과 동시에 채용신은 총리대신 윤용선(尹容善)의 천거로 충남 정산군수(定山郡守)에 임명된다.

글 사진=하대성기자,동영상=이형기 프리랜서

 ■  도움말 주신 분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 김호석 초상인물화가, 전우용 서울대병원 역사문화센터 교수,이원복 중앙박물관 학예실장, 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 이용엽 국편사료조사위원, 변종필 미술평론가, 이철규 예원예술대 교수,

 ■ 공동기획   전북도민일보사 - 전북도립미술관 - 익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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