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성직자’ 에르되시
‘수학의 성직자’ 에르되시
  • 김인수
  • 승인 2011.10.27 15: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헝가리의 수학자인 폴 에르되시(Paul Erds, 1913.9.20-1996.9.20)는 함수론, 기하학, 정수론 등 수학의 전 분야에 걸쳐 무려 1천4백75편의 논문을 남긴 20세기의 대표적인 수학자이다. 그는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3살에 3자리 수 곱셈을 암산으로 하고, 4살에 음수를 터득한 수학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를 진정 위대하게 만든 것은 이런 타고난 천재성을 뛰어넘는, 지칠 줄 모르는 수학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집도 갖지 않았다. 또 세상의 부와 명예에도 관심이 없었다.

수학노트가 든 남루한 여행용 가방과 옷가지가 든 오렌지색 플라스틱 가방이 그의 전 재산이었다. 이 간단하고 간편하기 짝이 없는 전 재산을 들고, 그는 수학적 문제를 토론하고 함께 연구할 수 있는 동료 수학자를 만나기 위해 60년 동안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4대륙을 여행했다. 이 대학에서 저 대학으로, 이 연구소에서 저 연구소로 옮겨 다니며 수학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는 한 도시에 도착하면 아는 수학자의 집에 불쑥 전화를 걸어 “나의 두뇌가 열려 있다”라고 말하며, 초청한 수학자의 연구실이나 집에서 동료가 지쳐 스스로 포기의 손을 들 때까지 연구를 한 뒤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수학에 미친 사람’ 혹은 ‘수학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수학적 진리는 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다. 인간은 그 진리를 재발견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평생토록 신이 숨겨둔 수수께끼의 베일을 한 꺼풀씩 벗겨내기 위해 노력한 열정과 몰두의 대명사인 폴 에르되시가 이번 주의 수학이야기 주인공이다. 그의 수학적 업적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으며 그 양도 엄청나게 많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론이나 틀을 짜는 수학자가 아닌, 특별히 어렵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의 해결사였다. 특히, 그는 조합론, 그래프 이론, 수론 분야의 문제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단지 문제를 푸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름답고 기초적인 풀이를 얻고자 했다. 증명은 결과가 왜 참인지에 대한 직관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여러 단계의 복잡한 수순으로 이루어져 통찰력에 도움이 되지 않은 증명은 의미가 적다고 생각했다. 그의 증명의 특징은 복잡한 문제를 아름답고 시각적인 방법으로 푼다는 점이다. 그는 1951년 수론 분야의 여러 논문으로 미국수학회(AMS)에서 수여하는 코레상(Cole Prize)과 1984년 울푸상을 수상했다.

수학계에서도 업적을 먼저 발표하려는 싸움이 종종 있다. 한 수학자는 자신이 해결 못할 문제라면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에르되시가 가까운 공동 연구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선권 싸움을 중재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숱한 수학자와 공동 연구를 한 에르되시 자신 스스로는 진리를 밝혀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세속적인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학원생 시절에 나는 삼류 수학자들이나 우선권 싸움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일류 수학자들이 그런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들은 수학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에르되시는 수학적 아이디어를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일에 대해서 언제나 관대했다. 남들보다 먼저 무언가를 증명하는 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었으며, 그의 목표는 오히려 누군가가 그걸 증명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에르되시는 수많은 수학자를 손수 배출하였고, 수학자들에게 적절한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수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한때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수학을 연구할 시간에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그의 병실에는 수학 저널을 가득 쌓아 놓고, 침대에 누워서 세 그룹과 동시에 수학을 토론하곤 했다. 한쪽 구석에 있는 그룹과는 헝가리어로, 다른 구석에 있는 그룹과는 독일어로, 그리고 나머지 그룹과는 영어로 수학 토론을 하였다. 수학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병실을 드나들자, 병원측의 짜증은 극에 달했지만, 에르되시를 멈추게 할 순 없었다고 한다. 1996년 3월에, 건강이 몹시 안 좋아졌을 무렵. 조합론, 그래프 이론, 계산 이론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에르되시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상했지만, 수학에 대한 열정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로서는 심포지엄에 불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칠판에 무언가를 쓰다가 막대기처럼 몸이 굳어지면서 가슴에 마이크를 부착한 채로 강단에 엎드려 있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 때 에르되시가 의식을 회복하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가지 말라고 해 주세요. 설명해 줄 문제가 두 개나 더 남아 있어요.” 이처럼 평생 수학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에르되시는 1996년 결국 눈을 감았다. 에르되시는 ‘죽는다’를 ‘수학을 그만둔다’라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그렇게 에르되시는 심장마비로 수학을 그만두었지만, 그의 뜨거운 열정과 집념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