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병오창의와 임병찬 장군
<3>병오창의와 임병찬 장군
  • 김상기기자
  • 승인 2011.10.20 1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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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노골화되던 1906년 6월 4일(음, 윤 4월 13일) 유림의 태두인 최익현은 정읍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마치고, 창의의 뜻을 밝힌다. 창의(倡義)란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병오 창의는 최익현을 맹주로 하고 임병찬이 주동한 것으로, 을사늑약 후 우리 전북지역 최초로 집단적 항일 무장투쟁이다.

창의군은 곧바로 태인, 정읍을 거치며 의병들을 모았다. 6월 7일에는 순창읍에 입성해 지휘본부를 객사에 설치했다. 여기서 대오를 정비해보니 총수가 800명을 넘었다. 그만큼 일제에 대한 반발과 구국의 일념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일본군에 맞서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결기가 하늘을 찔렀다.

▲미완으로 막내린 병오창의

하지만 6월 20일 순창에 나타난 군인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우리의 진위대, 즉 관군이었다. 자칫 동족끼리 피흘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왜병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결전할 일이나, 진위대 병사라면 우리가 어찌 동족끼리 싸울 수 있겠느냐. 이는 동족상쟁으로 우리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익현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명령을 내린다. 이때 의병들은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최익현의 간곡한 만류로 어쩔 수 없이 해산하고 말았다. 결국 임병찬을 비롯한 12명만이 최종적으로 남아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다. 최후의 항전을 주장했던 이들이 바로 순창의 12의사다.

현재 순창군 구림면 화암마을 입구에는 ‘최익현 선생 피체지’가 남아 있다. 일반의 사료는 병오창의군이 체포된 곳을 순창객사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최종 전적지는 화암리 일대다. 하지만 현재 현지에는 도로변 한 귀퉁이에 작은 설명표지판 하나가 덩그러니 서있을 뿐,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구국을 외치며 의연히 창의했던 구국열사들의 의기를 너무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까움마저 일었다. 이곳을 최익현 선생 피체지라는 표현보다는 순창 12의사가 최후까지 항전했던 사적지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절실했다. 그들의 결연한 항전지를 피체지로 폄하하는 현실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붙잡힌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유배됐다. 그해 11월 17일 최익현은 차가운 일본 땅에서 순국한다. 임병찬은 후에 한국의 황태자, 곧 후일의 순종이 재혼하는 재빙 가례가 있어, 모든 죄수에게 감형 또는 석방의 은전을 내리어 석방된다. 이로써 1906년 2월부터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병오창의는 최익현의 순절과 임병찬의 석방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참여했던 800여명의 우국지사는 좌절하지 않고, 그 뒤에 각기 자기 고을에서 의병을 모아 왜의 군경과 대치함으로써 한말 의병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임병찬 장군 공적 재평가 필요

“임병찬의 기우는 헌양하고, 목소리는 우레와 같으며, 눈빛은 번개와 같은 호랑이 눈이요. 눈썹이 천창을 떨치고, 위의는 출중하며, 언어는 항상 중용을 지키니 사람들이 우르렀다.”

순창의 최후 12의사를 선봉에서 이끈 임병찬 장군에 대한 최익현의 평가다.

그렇지만 100여년이 지난 지금 의병장 임병찬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또한 전북지역 한말 의병운동의 도화선인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되면서 의병운동 자체에 대한 평가마저 소홀히 다뤄지는 측면이 있음을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알게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동학농민혁명과의 악연때문으로 짐작된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3대 우두머리 중 한 명인 김개남 장군이 바로 임병찬의 밀고로 붙잡힌 것이다. 당연히 동학에서는 임병찬을 멀리하게 됐고, 동학이 대세인 정읍에서 임병찬의 의병은 제대로 된 평가조차 못 받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당시 임병찬은 무성창의의 공적으로 조정에서 내린 무남영자령관과 임실군수라는 벼슬을 연이어 거부했다. 또한 최근에는 임병찬의 밀고가 나머지 동학도들을 구하기 위한 고육지계란 주장까지 나오면서 임병찬과 동학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재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임병찬 창의유적지가 있는 정읍시 산내면에서 ‘산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카페를 운영하며 지독한 지역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김현기(41)씨는 “동학과의 관계를 매듭짓지 않고서는 임병찬 장군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항일구국에 바친 생애

대마도에서 귀환한 임병찬은 노심초사 하던 중, 1914년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대한독립의군부 조직을 서둘렀다. 그러나 이 조직공작은 한 동지의 실수로 왜경에게 탄로 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어 임병찬은 일본 총독 데라우치를 대리한 경무총장 타치바나와의 면담에서 한국독립을 역설한 후, 총독과 일본 내각 총리대신 오오쿠마에 각각 두 차례씩 한국독립을 주장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것이 결국 화근이 돼 임병찬은 일제가 만든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거문도에 유배된다. 이곳에서 2년간에 걸쳐 일제의 온갖 탄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항거하다 1916년 끝내는 비분절사했다. 이같이 임병찬 선생은 그의 생애를 오직 항일구국의 투쟁에 바쳤던 것이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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