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세종, 사극의 지나친 설정
태종과 세종, 사극의 지나친 설정
  • 이동희
  • 승인 2011.10.18 17: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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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 드라마에서 태종이 세종의 멱살을 잡는 한 장면을 보았다. 세종의 한글창제를 두고 궁중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역사추리극의 한 대목이다. 아마도 극중 흥미를 더하고, 태종대와 비교선상에서 세종 치세를 더욱 빛내기 위한 설정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종과 세종의 관계를 적대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아무리 역사가 문화콘텐츠로 각광받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지나치다. 태종은 세종의 멱살을 잡은 군주가 아니라 세종대의 치세를 가능하게 해준 장본인이다. 반면 세종은 태종의 뜻을 잘 받들어 이어나간 군주이다.

태종은 재상중심의 정치체제인 의정부서사제를 혁파하고 그가 원하던 국왕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직계제를 확립하여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전까지는 국정의 중대사를 의정부재상들이 의결하였는데, 이제 육조에서 직접 임금에게 보고하여 왕이 처결하였다.

체제개편에 공신세력 숙청이 동반되었음은 물론이다. 체제개편은 곧 기득권층의 특권을 박탈하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는 공신세력으로 조정에 남아 있는 자가 거의 없었다. 많은 공신들이 쫓겨났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심지어 태종은 그의 민씨 처남 넷을 모두 죽였다.

태종은 국왕이 정국을 주도할 있는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공신을 비롯해 조정내의 특권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후, 태종 18년 양녕에서 충녕으로 세자를 바꾸고 왕위를 양위하였다. 조선건국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된 조선을 세종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태종은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태종은 살아서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으나 군사권은 주지 않았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세종이 왕으로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도 만약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제압하기 위해 군사권은 넘겨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세종의 장인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심온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였다. 태종에게 심온은 세종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회안대군 방간도 태종이 상왕 때 운명하였다.

태종은 또 세종에게 황희를 천거하기도 하였다. 우리 역사상 명재상하면 황희정승을 떠올리는데, 황희와 세종을 연결해준 이가 태종이다. 황희는 태종의 측근으로 태종대에 정치개혁과 공신숙청을 같이했던 인물로 태종대에 이미 육조판서를 비롯해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양녕을 폐위하는 것에 반대하자 남원으로 유배를 보내지만, 세자를 충녕으로 바꾼 후 황희를 불러들어 세종에게 천거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이런 황희를 중용하여 한 시대를 같이하였다. 황희는 영의정만 무려 18년을 하였고 좌우정승까지 합치면 세종 재위 31년에 20년이상을 정승자리에 있었다. 태종은 살아서 세종의 안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을 정리하였고, 사후에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를 길러 세종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예전에 인기리에 반영되었던 ‘용의 눈물’이라는 사극에 나왔던 대목으로 기억된다. 태종이 왕위에 올라 역사에 길이 남을 성인군주가 되겠다는 각오를 비치자, 그의 측근이자 공신인 이숙번이 당신은 너무 많은 피를 묻혀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고 답한다. 이에 태종은 크게 실망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것이 결국 태종이 세종에게 ‘이세상의 악업은 다 내가 지고 간다. 너는 성인군주가 되거라’라는 유언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이런 이야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호사가들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송의 파급효과는 드라마의 명대사가 역사적 한 장면으로 기억될 만큼 크다. 특히 한국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하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후일 누군가는 태종이 세종의 멱살을 잡는 장면만을 기억할지 모른다.

예전의 사극은 현재의 사극과는 인식에 큰 차이가 있다. 적어도 흥미 때문에 분명한 역사의 핵심골격까지 왜곡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역사가 문화의 시대에 휘둘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주어서야 되겠는가.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어진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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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er 2013-01-27 01:5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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