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조선城 어디가고 왜성만 남았나
<14>조선城 어디가고 왜성만 남았나
  • 하대성
  • 승인 2011.10.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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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의 꽃을 피운 어진화사. 민족정기와 충의정신을 목숨처럼 아꼈던 작가. 상업미술 효시인 공방을 최초로 운영한 프로 화가. 이는 전북출신 어진화가 석강 채용신(1850-1941)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채용신 탄생 160주년, 서거 70주년을 맞은 2011년. 우리는 왜 이 시대에 채용신을 주목해야 하는가. 조선정신에 오롯이 마지막 정점을 찍었던 화가로서의 면모, 사진속에 함몰된 고유의 미학적 전범들, 그가 도달한 전통 초상화의 지평이 사라져 버렸다. 진정한 조선의 혼과 정신을 지독하게 고집한 채용신. 일제,미군정,현대라는 시대 흐름속에서 우리는 그 전통성을 잃어버렸다. 숭고한 정신을 되찾고 예술혼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때다. 채용신이 추구하고 이룩한 가치가 너무나 크고 고귀하다.
  그가 일군 화력(畵力)과 시대정신을 좇아 90평생의 여정을 겸허히 따라가 본다. 루트는 탯자리인 서울 삼청동에서 유택(幽宅)인 익산 왕궁 장암리까지. 채용신의 후손과 전문가, 향토사학자, 지역원로들이 함께 했다.

 

▲ 빌딩 숲에 까까머리처럼 보이는것이 부산진성이다.

 <14>부산진성,최고의 요충지    

‘1893년 어느 여름날 오시(午時), 동헌에 말발굽소리가 요란했다. 한 병사가 첨사에게 알현을 청했다. 그의 손에는 돌산진첨사 채용신에게 보낸 고종의 인사명령서, 곧 훈령이 들려 있었다. ‘돌산진수군첨절제사 채용신을 철도진수군첨절제사(鐵島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한다. 계사년(癸巳年) 7월.’ 철도진은 서관(西關)의 먼 변방으로 황해도에 있지 않은가. 부모가 늙고 길이 먼 곳이어서 채용신은 한 동안 고민했다. 때마침 그 실정을 임금께 아뢰는 이가 있었다. 그 분 덕분에 근무지가 영남 부산진(釜山鎭)으로 변경됐다. 3년간 부산진 수군첨절제사로 근무한 채용신. 온화한 성품으로 민심을 크게 얻은 그가 부산진을 떠나게 되었을 때,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칭송했다.’ 이것은 기록에 나타난 채용신의 부산진 근무 내용의 전부이다.

#피비린내 나는 상육의 현장

▲ 부산진성에 남아 있는 왜성 흔적.
한반도 최동남단, 부산은 일본과 맞닿는 국경지대이다. 실제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약 50km 정도밖에 안 된다. 가까운 거리다. 이러한 지형적 영향으로 부산진은 임진왜란(1592~1599) 최초의 전투지역이였다. 임란 300년 후에도 채용신이 근무한 부산진은 여전히 요충지였다. 지난 9월말 부산진성을 답사한 취재진은 좌천동의 증산에 있었던 본성(母城)과 동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지성(子城)일대에서 채용신의 숨결을 느껴봤다.

‘자성대공원’으로 알려진 부산진 지성에는 왜성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산책길을 따라 도열한 듯 왜성이 있다가 숲사이에서 불쑥 불쑥 나타났다. 채용신도 이곳에 근무하면서,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왜성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300년 전 700여척 병선에 20여만 명의 왜군이 조선을 침범, 피비린내 나는 살육했던 그 현장. 성을 허물고 수백호 마을을 불태웠던 잔학한 그 모습. 성안은 불에 타 검은 연기가 가득하고,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만 낭자했을 터. 이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산책하는 중년들, 물통 들고 가는 노인이 가끔씩 눈에 띠였다.

#자성대 바다매립으로 사라져

▲ 복원된 부산진성의 동문.
이곳 자성은 모성인 부산진성만큼이나 험한 세월을 보냈다. 임란때 성이 허물어지고 왜성의 자성이 되었다가, 왜군을 몰아낸 뒤에 명나라의 만세덕 군대가 일시 주둔했다. 그 뒤 조선에서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4대문을 만들어 부산진첨사영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일제 침략기에 성은 마침내 철거되었으며 자성대 일대의 바다는 매립돼 옛 모습은 사라졌다. 조선성은 사라져 볼 수 없고 왜성만 남아 그 당시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 18세기 부산지역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동래부사접왜사도>에는 부산진성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래부사접왜사도>를 보면 부산진성의 옛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동래부에 도착한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병풍에 넓게 펼쳐진 화면은 산수와 인물, 건물이 어우러진 파노라마식으로 구성됐다. 화면 오른쪽 성이 부산진 자성이다. 4대문과 영가대가 선명하다. 바닷가에는 병선 3척이 정박해 있다. 성안에는 공진관(객사),검소루,진남대(장대)가 잘 묘사돼 있다. 해안가엔 가옥들이 즐비하다. 지금의 범일동,좌천동에 해당된다. 서문 앞은 시장터. 지금의 부산진시장과 남문시장이다.

#왜군을 크게 경계하라
한편 임란 이후 조선 조정은 부산진 지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서문에다 ‘남요인후(南?咽喉)’ ‘서문쇄약(西門鎖?)’이라는 기둥 돌(부산진 지성 서문성곽 우주석·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9호)을 세운다. ‘남쪽 국경은 나라의 목과 같이 중요하고,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이 굳건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군을 크게 경계하라’라며 새긴 것이다. 자성대 위의 장대는 ‘진남대’라 하고 편액을 달았다. 진남대는 지금 보수공사중이다.

본성인 부산진 성터는 자성에서 직선거리로 1키로 남짓이다. 1890년에 세워진 부산진교회, 1895년에 설립된 일신여학교, 한국전쟁 중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한국선교회에서 세운 일신기독병원 등 부산의 유서 깊은 근현대 건축물이 자리한 곳 사이에 옛 성곽 형태의 사당 하나가 생뚱맞게 자리해 있다. 이곳이 임란때 정발 장군을 비롯한 주민들이 장렬히 싸웠던 ‘부산진 성터’이다. 정발장군 비석과 사당이 모셔진 정공단이라는 현판이 붙여있다. 입구 좌우엔 깃발이 펄럭였다.

#10개 비석 도열…蔡龍臣명문 안보여

▲ 첨사비.
담장 곁에는 부산진첨사비 10개가 도열해 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비문을 훑어봤으나 ‘蔡龍臣’이란 명문은 보이지 않았다. 세웠다는 기록은 있는데, 세워진 비석은 없고……. 어찌 된 것인가? 어디 쳐박혀 못 찾은 것인가. 훼손돼 멸실된 것인가. 아니면 기록이 잘못 된 것인가. 알 길이 막막했다. 부산동구청을 찾아가 금석문 자료까지 뒤져봤으나 허사였다. 1895년에 첨절제사제도가 폐지됐다고 하니 채용신 흔적 찾기는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글·사진=하대성 기자, 동영상=이형기 프리랜서

 

 ■  도움말 주신 분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 김호석 초상인물화가, 전우용 서울대병원 역사문화센터 교수,이원복 중앙박물관 학예실장, 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 이용엽 국편사료조사위원, 변종필 미술평론가, 이철규 예원예술대 교수,

 ■ 공동기획   전북도민일보사 - 전북도립미술관 - 익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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