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호남의병의 도화선 호남유림대회
구한말 호남의병의 도화선 호남유림대회
  • 김상기 기자
  • 승인 2011.10.10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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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보단 사적비
“명성황후가 폭악무도한 일본에 의해 살해되자 이에 대한 복수심이 고조돼 1903년 무성서원에서 호남지역 향교에 통문을 보내 각 향교에서 54명의 전라도내 유림들이 내장산 벽련암에 모여 단을 쌓고 명성황후를 추모하고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서했으니 이 단을 서보단 또는 영모단이라 한다.”
-서보단 사적비 비문내용 중에서

20세기 초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을 때, 호남을 대표하는 유림들이 타도일본을 외치며 정읍의 무성서원에 집결했다. 양반의 근거지가 됐던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림으로써, 전국에 산재했던 600개가 넘는 서원 중 단 47개만 남고 모조리 통폐합되는 대학살을 당했다.

전북은 당시 풍파 속에서 오직 정읍의 무성서원만이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성서원의 유림이 거사하는 거점이 됐다.

△혈서로 일본에 복수 결의

유림들은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의 흉계에 의해 시해 당하고, 그해 11월 친일내각에 의해 단발령이 강행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들을 일으켜 봉기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에는 항일이라는 정신으로 무장됐을 뿐 전혀 체계를 갖추지 못해 미풍으로 그치고 만다.

그러다, 고종 광무 7년인 1903년 3월 한양 유림대회에서 국모에 대한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명성황후 감모비 건립사업이 추진됐다. 비록 무장세력으로 발전하진 못했지만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명성황후 추모라는 형태로 거세게 불타올랐다. 이후 추모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지역마다 감모비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전개됐다. 호남지역에서는 그해 6월 정읍 무성서원이 전라남북도 각 고을 향교에 사발통문을 돌려 7월 15일 정읍 내장산에서 호남유림대회를 열었다.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27개 향교 54명의 유림들이 모여 감모비 건립을 위한 성금모금을 결의했다. 향교를 대표하는 유림들은 이곳에서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서보단을 세워 일본을 영원한 표적으로 삼았다. 항일 운동의 투쟁의지를 다진 것이다. 유림들은 모두 석란정에 올라 화선지를 바닥에 깔았다. 붓 대신 자신들의 손가락을 단지해 혈서로 복수를 맹세했다. 항일 투쟁 의지를 결의한 글귀를 쓴뒤 복수를 다짐하는 서찰, 즉 서보단을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의 모임을 기억하고, 명성황후의 해원을 맹서하며 해마다 8월 20일에 추모제를 갖기로 결의한다. 이 자리는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서한 유림들의 집단적 결의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전북지역은 1906년 병오창의로부터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이 본격화된다. 이에 앞서 거행된 호남유림대회가 그 정신적 자양분이 됐던 것이다.

▲ 벽련암

당시 유림들이 모여 서보단을 쌓았던 장소는 현재의 정읍 내장산 벽련암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석란정이 있었다는 표지석이 하나 남아있을 뿐이다. 벽련암은 내장산 서래봉 중턱 330m 고지에 있다. 원래는 내장사란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던 것이 근세에 와서 영은암(현재의 내장사)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백련암이라는 이름으로 격하됐으며, 이후 벽련암으로 고쳐쓰게 됐다. 당시만 해도 이곳이 내장산의 대표 사찰이었다. 한말 한일 의병을 촉발한 호남유림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역사적 현장엔 표지판만 남아

▲ 석란정지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는 석란정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내장산에서도 으뜸가는 경치를 자랑하는 벽련암, 그 뒤로는 서래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석란정은 서래봉 바로 밑에 자리해 있다.

요금소에서 내장사까지는 한참이지만, 그 길은 평지여서 풍광을 보며 시나브로 걸을만한 하다. 하지만 석란정은 내장사 일주문에서 우측으로 0.9km를 가파르게 올라야 도달하는 벽련암에서도, 다시 뒤편 서래봉쪽으로 한참을 더 올라 가야 나타난다. 그리 멀진 않지만 경사가 가파르다보니 쉽사리 오를수 있는 길은 아니다. 현지에는 지금도 큼지막한 바위 표면에 새겨진 ‘석란정’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하지만, 글씨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건물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법하지만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호남을 대표하는 유림들이 거사했던 역사적 장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오직, 간략한 안내문 하나만이 이곳이 역사적 현장임을 증명한다.

△호남유림대회는 한말 의병의 자양분

1903년 호남유림대회가 열리고, 1906년 정읍 무성서원에서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이 의기투합해 봉기함으로써, 한말 호남의병사가 쓰여지게 된다.

현재, 당시의 항일 의병활동을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물은 석란정 표지석과 함께 1991년 내장사 가는 길 주변에 다시 세운 ‘서보단사적비’가 유일하다. 이 비석은 내장사를 향하다 보면 오른편 길가에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지만,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국권을 침탈하는 일제 맞서 구국의 일념으로 항일 의병을 봉기했던 항일 투쟁사의 상징물이지만 후세에게는 망각의 현장이 되고 있음을 이번 취재를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

 

- 내장산 벽련암 대우스님 인터뷰

▲ 대우스님
거울을 보면/ 거울속의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빙그레 웃는다.

나는/ 눈을 감는다/ 내 마음/ 들킬까봐

-대우스님의 ‘거울을 보면’ 전문

호남유림대회의 역사적 현장인 내장산 벽련암을 지키고 있는 대우스님은 시인이다. 지난해 대한문단작가회 주최로 열린 대한문학제 시상식에서 연암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을 만큼 좋은 글 솜씨를 자랑하는 스님은 지인들에게 자신의 글을 나눠주는 취미를 즐긴다.

1959년 조계종 출가 후 총무원 교무부장과 포교부장, 총무부장 등을 거치면서 ‘길을 묻는 이에게’, ‘어둠을 비질하며’, ‘한 생각 쉬면’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1903년 호남유림대회 당시 유림들이 석란정에 모여 서보단을 세웠다고 하지만, 실제 회합은 바로 이곳 벽련암에서 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여기가 지금은 벽련암이지만, 옛날에는 내장사였어요. 내장사 전체가 6.25때 불타버리고, 후에 복구를 했는데 지금 내장사라 부르는 곳부터 복구를 했지요. 그래서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여기가 내장사의 원터가 되는 거지요. 당시 유림대회한다며 그만한 사람이 다 어디에서 모였겠어요. 여기만한 데가 없지요. 유생이든 누구든 다 여기 모여서 그 기념비적인 거사를 한 것이지요.”

그는 암자 뒤편에 석란정이 있던 터가 남아 있다고 안내해 준다.

그리고 벽련암 뒤편에서 자생하는, 길게는 560년이나 됐다는 자생차로 만든 차를 내놓으셨다. 그윽한 향과 맛이 일품이다. 스님은 차와 함께 “모름지기 몰라야 공부가 되지, 알면 넘쳐서 안해요”라는 말한다.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한말 의병사에 대한 더 많은 탐구를 주문한다.
 

/김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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