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구한 전북혼 되새긴다
나라 구한 전북혼 되새긴다
  • 김상기기자
  • 승인 2011.09.3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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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다’는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우국충절의 기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등 국가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사수하며 목숨을 초개같이 나라에 바친 호남인, 전북인의 구국일념의 상징이다.

왜구의 유린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전북인들의 선혈과 투혼은 400여년 의 세월을 넘어 일제의 조선침략 야욕이 재발호한 구한말에도 다시 불타올랐다. 전북이 항일 구국 의병 항쟁의 중심지로 우뚝 선 것이다.

일제는 임진왜란의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동학농민혁명 이후 전북지역 민중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가해 항일 의병 의지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일제의 극렬한 탄압에 밀려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전북은 항일 의병의 중심지로 다시 우뚝서는 민족혼의 발원지다.

▲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첫 도화선이 된 병오창의가 일어난 무성서원. 면암 최익현과 임병찬이 중심이 돼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후 각지에서 대일 항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전북에서 한말 항일 의거가 태동한 것은 1906년 정읍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임병찬의 주도로 유림의 태두 면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부터다. 태인의 의병은 그 군사의 활동만을 본다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유림의 태두인 최익현의 비중으로 인해 그 후의 항일 투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계기가 됐다.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선 최익현의 활약은 인근의 유림과 백성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태인의병을 계기로 각지에서 항일 투쟁이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난 일제가 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고 정미조약을 체결한 1908년과 1909년 전국적인 항일 의병 활동을 절정에 달했다.특히 호남지역의 항일 의병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1908년 말 이후 1909년 접어들면서 호남지역은 전국의병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항일 의병 운동의 무게중심이 강원도와 충청북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호남과 전북으로 옮겨진 것이다.

한말의 의병항쟁에서 빛나는 전과를 남긴 호남지방은 일찍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였으며, 뒷날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는 소작쟁의를 강렬하게 전개했던 항일 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이것은 이 지방이 일찍부터 관료적인 착취에 시달려 반항의식이 강했으며, 또한 개항 이후 일제의 경제적 수탈로 인해 생활이 더욱 어려운 생활로 허덕여야 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와 차별, 수탈을 당해왔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유치 실패 등으로 전북이 위기를 맞고 있다.분열과 갈등, 불협화음등 파열음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각계의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운 도전과 혁신의 전기로 삼는 지혜와 슬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대오를 가다듬고 도민의 의지를 하나로 결집해 재도약과 도민화합을 위해 전진해야 한다.나라와 민족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할때마다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기개와 기상은 전북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말없는 가르침을 준다.

본보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약무호남 시무국가 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해 전북의 한말 항일의병투쟁사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기획시리즈를 보도한다.

구한말 의병사는 한민족의 투쟁사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이 노골화된 한말 항일 의병활동은 짧지만 굵은 역사적 의미와 함께 일제 강점의 암흑기에 항일투쟁을 촉발한 빛나는 한민족의 투쟁사다.

비록 일제의 침략을 분쇄하진 못했지만 목숨을 던진 구국항쟁은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이후 3.1운동과 광주 학생 의거등 민족 독립과 항일 투쟁의 원동력이 됐다.

이때의 항일 의병은 비단 일본군뿐만 아니라 친일 정부와 그 관리들, 그리고 관군조차도 적으로 해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혹독한 탄압속에서 힘겨운 투쟁이었다. 한말 의병의 항쟁이 단지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한다는 구국적 차원에서 전개됐음을 의미한다.

한말의 우리나라는 열강들의 발호속에 바람 앞의 등불같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 일본 세력이 동아시아 패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세력이 한반도로 물밀 듯이 몰려오는 역사적 대 전환기였다.

한국정부는 자의건 타의건 변혁과 개화의 회오리에 휘말려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 앞에서 우리 정부는 너무도 무력했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호남유림대회에서 항일투쟁 태동

일제 침략은 경제적 수탈과 영토의 침탈만이 아니었다. 문화와 역사의 유린이 자행됐다.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의 친일내각에 의한 단발령의 강행은 한말 의병항쟁의 발단이 됐다.

이 두 사건은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과 전통적 풍습을 완전히 무너뜨린 대사건이었다. 전국 각처 유림들이 주도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때까지 전북지역에서의 항일 의병활동은 사실상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봉건 정부의 수탈과 일본의 침략에 맞선 반봉건과 반외세를 기치로 내건 동학농민혁명의 위세에 놀란 일제가 가혹하리만치 민중에 대한 탄압을 가했고 농민봉기에 위압감을 느낀 유림까지 의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을미의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기간으로 따지면 일년이 채 못되는 짧은 것이었다. 우선 의병자체가 항일이라는 정신으로 무장됐을 뿐 무기도 보잘 것 없는 데다가 전혀 훈련이 되지 않은 집단에 불과했다. 또한 유생들과 포수, 농민 등 서로 다른 신분 층으로 구성된 의병진 내부의 갈등도 큰 문제였다.

1903년 한양유림대회에서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감모비 건립사업이 추진됐고, 각 도별 모금운동이 일어났다. 전북은 당시 서원철폐령의 암흑 속에서도 유일하게 남아있던 무성서원이 각 고을 향교에 사발통문을 돌려 정읍 내장산에서 호남유림대회를 열었다.

이때부터 전북지역의 항일 의병 봉기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내 27개 향교에서 54명의 대표들이 내장산 벽련암 인근 석란정에 모여 감모비 건립을 위한 성금모금했다. 서보단을 쌓아 영원한 표적으로 삼고, 국모의 해원을 맹세했다. 해마다 8월 20일에 추모제를 갖기로 했다.

이 대회는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촉발하진 못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서한 유림들의 첫 번째 집단행동이라는 의미에서 한말 전북의병사의 시발점이라 할만하다.

이후 구체적 발현으로서의 의병활동 또한 무성서원이 거점이 된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침탈에 대한 무력 대응으로서 의병들의 봉기가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항일 투쟁의 거점으로 급부상

▲ 고 김대중 대통령이 쓴 ‘호남의병창의 동맹단결성지’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1907년 음력 9월 12일 이석용 등 1천여명이 창의동맹단을 결성, 고천제를 지내고 조국광복의 대업을 스스로 맡아 꼭 완수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니, 이로서 호남최초의 조직적 항일운동이 시작된다.
전북에서 을사의병이 일어난 것은 다른 지방보다도 조금 늦은 1906년 여름. 태인 칠보 무성서원에서 면암 최익현과 임병찬이 중심이 돼 의병를 거사한 것이다. 이들은 무성서원에서 거의하면서 태인 관아를 점령하고 순창까지 파죽지세로 입성해 관군과 대치했다.

하지만 최익현은 동족끼리 피를 볼 수 없다며 싸움을 중단, 스스로 포로가 돼 1907년 1월 쓰시마섬에서 순국하고 만다.

병오창의는 군사적 활동으로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유림의 태두인 최익현의 비중으로 인해 이후의 투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74세의 유림의 태두가 항일의병의 최전선에 나섰다는 상징성만으로도 유림과 백성에게 큰 자극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항일 투쟁이 들불처럼 확산됐다.

을사의병(1905~1906)은 그대로 정미의병(1907)으로 이어졌다.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 후 서울의 시위대 군인을 비롯해 지방의 진위대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항일 의병 운동은 이제 보다 더 조직화되고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게 됐다.

거족적인 항일 의병 항쟁은 1908년과 1909년의 2년간 가장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특히 호남에서의 의병의 위세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08년 말 이후 1909년 접어들면서 호남지역은 전국의병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그 이전까지 전국에서 가장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일대의 의병전쟁이 급격히 가라앉으면서 호남지역이 대규모의 항일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전북은 구국의 성지

▲ 1994년 전주시 덕진동 어린이회관 인근에 세워진 ‘전북지역독립운동추념탑’. 당시까지 확인된 5백88명의 우리 지역 독립투사들 이름이 일일이 열거돼 있다.

한말의 항일 의병 항쟁에서 빛나는 전과를 남긴 호남지방은 이보다 앞선 4백년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나라를 구해낸 구국의 성지다.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백천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호남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떨쳐 일어나 오르지 구국의 일념으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 싸웠다.

부녀자와 노인들은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여 군량미와 군포 조달 등 군수 지원에 나서는 등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총력전을 펼쳤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아 존망의 기로에 섰던 국가와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서 건져올린 것도 호남인의 투쟁이었다.

이순신 휘하의 전라수군이 거둔 한산대첩과 명량대첩, 권율이 이끈 만5천의 호남병력과 김천일의 의병이 거둔 행주대첩, 최경회 등 호남의병의 연합작전에 의한 1차 진주대첩과 김천일 고종후 논개 등 호남의병의 목숨을 바친 2차 진주성 혈전 등 격전의 현장은 바로 호남인, 전북인들의 구국의 투쟁사나 다름없다.

선조들의 우국충절은 400년의 시공을 초월해 한말 항일 의병 정신으로 계승됐던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강제적인 합병에 따라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항일 의병운동은 사실상 거점을 상실했다. 대부분의 의병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야만 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속에서 국내에서의 항일 투쟁이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이다.

만주벌판을 유랑하면서 새로운 군사 단체를 조직하고 일제에 맞서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구한말의 항일 의병은 1910년 이후 급격히 세력이 약화됐으며 1914년 사실상 종식을 고했다.

이후에는 만주와 연해주를 기지로 해외에서의 본격적인 독립군 전투로 전환하게 됐다. 이제 의병들은 독립군으로 그 이름을 바꿔 광복의 그날까지 나라 잃은 한을 가슴에 품은 채 타국에서 항일 독립 투쟁에 나선 것이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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