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은 지금
초록은 지금
  • 진동규
  • 승인 2011.08.1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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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암이 오르는 길이다. 배암이 틀임 하면서 용으로 오르는 길이 백담사 길이다. 만해 스님 시절 같았으면 길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을 터이다. 험악한 바위 골짜기를 훑어 내리는 계곡이 백은 좋이 넘어 보이는 소로 이어지는 길이었을 터이다. 그렇게 이름도 없었던 사찰이 손꼽히는 관광명소가 되어버렸다. 단돈 이십 몇 만 원밖에 없다고 했다던가. 궁핍하고 궁핍한 삶을 한마디로 축약해 냈다. 참으로 참담한 삶을 잘도 표현해 그야말로 관광명소가 되어버린 백담사다. 그때 백담은 물굽이 휘도는 못이 아니라 깨어진 바가지쯤 되었던가 보다.

폭풍에, 장마에 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넘치고 난리가 아니었는데 딴 세상이다. 흐르는 물이 맑기까지 해서 더욱 그러하다. 짙푸른 숲은 그대로 초록이다. 초록이 하늘을 빨아대고 있다. 팅팅 불은 구름젖을 빨아대고 있다. 내일까지는 쏟아질 것이라는 일기예보다. 송아지의 식욕이 어미 사정을 살필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빨아댄 젖을 치받으며 빨아대는 송아지다. 뿔도 안 난 머리로 떠받으며 어미 젖을 빨아 배를 불려야 한다. 젖을 빨던 혀가 억새 칼날도 감아 먹을 만큼 억세져야 하고 땅바닥에 붙은 질경이를 뜯을 만한 이빨도 돋아나야 한다. 그래야 목매기띠를 벗어날 것이 아니겠는가. 하루 종일 풀을 뜯어야 할 숙명으로 태어난 송아지는 넷이나 되는 위를 일단은 채워야 하리라. 그리고 되새김의 연습 또한 길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주어진 운명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한다.

두 발로 태어나고 직립보행을 하도록 태어난 신체 구조를 탓하는 이도 있을까? 내 집 골목길 걷는 일을 예쁜 고래 새끼가 헤엄치듯 그렇게 걸었어야 했다. 지느러미 너울거리듯 두 팔을 휘저으며 휘파람을 불었어야 했다.

물길이 제방을 무너뜨리고 새 길을 내기도 한다. 이웃나라에서는 도시를 쓸어버리고 원자력 발전소를 덮쳐 버리기도 했다. 성서의 묵언처럼 지구의 재앙을 예고하기도 했다. 지금 누구를 탓하고 단죄할 것인가. 그렇게 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식당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두 발로 서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두 발로 뒤꿈치에 힘을 주고 지구에 철심이라도 박아 넣을 듯 서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당장이라도 옮겨 디딜 자세다. 황새는 오그린 발의 무릎만 쭉 펴면 내어 디딜 자세로 서 있지 않던가. 날개를 주 이동 수단으로 삼는 새인데도 잠깐 걷는 두 발을 그렇게 훈련시켜 놓았던 것이다.

길이 떠내려가버린 일도 있었다. 그 길은 잘못 낸 길이 아니겠는가.

초록이 무섭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특별히 무엇을 은유한 것은 아닌듯한데 좀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붉은색이나 검정색이 아니지 않는가. 학교교육에서부터 붉은색을 두려워한 세대도 아닌데 별나다 싶었다.

초록은 얼마나 아름다운 색인가. 밤하늘에 반딧불이를 날려 올리는 초록이 아니던가. 반딧불이 나는 초록 숲은 지금, 지금 잔치의 한가운데다. 열애중이다. 비암은 산에서 내려와 개구리 우는 물가로 가고 있다. 바쁘게 울어대는 새소리, 해 질 무렵의 머슴새 울음과 함께 딱따구리들 골짜기에 박자를 넣지 않더냐. 뻐꾹새 말고도 자지러지게 자지러지게 몰아쉬며 날던 놈. 밤을 지새우는 귀촉도까지 초록 숲은 틈이 없다. 멧돼지가 사람 사는 마을까지 내려온다고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지 않는가. 어차피 우리는 함께해야 할 세상이 아닌가.

흥부네 지붕에는 지금 흰 박꽃이 달빛을 빨아들이고 있다. 허공 가득히 흐르고 있는 달빛을 마셔대고 있다. 배부른 배부른 박을 보아라. 박 넝쿨과 흰 박꽃이 가려주고 벗겨 주면서 빚어낸 작품이 아니더냐. 지붕 위의 박 속은 부끄럽고 부끄러운 속살보다 희고 땅바닥에 뒹구는 수박 속은 붉다 못해 선홍색이다. 초록이 아니고 누가 이 아름다운 색을 비벼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진동규<시인·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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