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출생 은희경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
고창 출생 은희경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
  • 김미진기자
  • 승인 2011.08.01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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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첫 단계에서 어김없이 닥쳐오는 일이지만 정말이지 온 세상의 문이란 문은 다 닫혀 있는 듯한 절망에 빠지거든요. 어떤 문을 두드려야 할지 마음은 급하고 자신은 없고 시간은 흘러 가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건 말할 필요도 없지요.” 「생각의 일요일들」본문 중에서

필연적으로 500쪽에 육박하는 장편소설을 완성해야하는 긴 호흡의 집필기간을 보내야만 하는 작가 은희경. 그가 새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꼭 하는 두 가지 일이 있다. 그건 바로, 집을 떠나 새로운 공간을 찾는 일과 손톱을 깎는 일. 익숙한 공간에서는 뻔한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아 떠나야하고, 손톱이 길면 갑갑해서 컴퓨터의 자판을 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는 소설과 일상의 경계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가는 어떤 공기를 호흡할까. 어떤 대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지극히 사적인 시간에는 무엇을 할까.

고창 출생으로 대한민국 대표작가인 은희경이 등단 이후 들고 나온 첫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달·1만2,000원)’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은희경 산문집’. 단 6자로 이미 열 권의 소설책을 낸 그의 발표작 제목을 줄줄이 읊어대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여보는 일이 사족이 되고 만다.

산문집은 지금껏 꼭꼭 숨겨왔던 작가 은희경의 유쾌한 내면을 탐독하는 시간이다. 작가가 소설을 연재하면서 틈틈이 썼던 글을 모은 만큼 작가의 창작 노트로 볼 수 있고, 책상 서랍 속 깊숙이 숨겨둔 비밀 일기장을 공개하는 떨리는 일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열어놓은 집필실 창문을 통해 작가의 사생활 주변을 기웃거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 와 마주할 수 있다.

“이 산문집 속의 글을 쓰는 기간이 내 인생에서 고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의 말에서 지금까지 써왔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함과 설레는 마음을 담은 소녀의 모습이 교차된다. 작가는 소설을 집필하던 일산과 서울 작업실, 원주, 그리고 잠시 머물다 온 독일과 시애틀에서의 생생한 이야기들 속에 조금의 보탬이나 과장 없이 오롯이 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의 블라인드를 열고, 날씨를 살피고, 시계를 보고, 커피콩을 가는 일상은 동시대에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밥 먹는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킬힐을 신고 스탠딩 공연을 보러 갔던 아찔하면서도 짜릿한 경험과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또 동생 책상 서랍을 우연히 열었다가 그곳에서 발견한 엽서 한 장이 소설의 첫 단추가 된 이야기, 글이 잘 써지지 않던 날에 사케집에 앉아 밤새 내리던 눈을 바라보던 일 등 그녀가 만났던 크고 작은 풍경과 관계들을 하나씩 펼쳐 놓는다.

평소 소설을 통해 보여주던 ‘다소 쿨함’보다는 ‘약간의 엉뚱함’과 ‘따뜻한 진지함’이 묻어나는 산문집. 여러 소설 속에서 다양한 주인공을 만들어 내던 작가가 이번엔 그 스스로 산문집의 주인공이 되어 친근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의 소설이 지독할 만큼 치열하고 치밀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시간이라면, 그녀의 산문은 잠시 쉬어가는 일요일임에 틀림없다.

김미진기자 mjy308@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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