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천(炎天)에 염치(廉恥)를 생각하다
염천(炎天)에 염치(廉恥)를 생각하다
  • 이동희
  • 승인 2011.07.21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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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수은주의 기록을 갱신하며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날씨에 각종 사회적인 이슈들이 갑갑증을 증폭시킨다. 아무리 염천지절이라 할지라도 살아가면서 챙겨야 할 염치는 있어야 한다.

성범죄의 원인이 여성들의 야한 복장이라는 주장에 반박하는 ‘잡년행진-Slut Walk’ 시위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도 열렸다. 슬럿워크는 올 초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 경찰관이 대학 강연 도중 내뱉은 “여성이 성범죄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헤픈 계집’(Slut)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는 발언에 대해 항의하고자 지난 4월 캐나다에서 시작된 것이다.

작년에 유럽 6개국을 주마간산(走馬看山)한 적이 있다. 저들의 심한 노출은 물론이고 사랑의 행각들도 숱하게 보았다. 그들은 공원이건 거리건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아무거리낌 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다. 동방예의지국(?)에서 간 촌놈이 처음에는 좀 야하고 신기한 생각도 들었으나, 로마에 가서 로마의 법을 따르다 보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여성들의 노출도 그렇게 보면 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최소한의 인간적 염치를 도외시하는 자리에 남성위주의 성적 차별의식이 만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몇 년 전에 필자의 지인 한 분이 부친상을 당했다. 작으나마 부의금을 챙겨서 문상을 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한 달여 만에 그 지인은 또 모친상을 당했다. 고령이시기는 했지만, 연이어 당하는 상사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역시 또 작으나마 부의금을 챙겨 문상을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의금을 받는 접수대에 한 장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연거푸 당하는 저희 친상에 정중한 마음으로 부의금을 사양합니다. 너른 양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정중한 안내문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한 달여 만에 양친을 잃는 통에 자식들은 정황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문객들에게 거푸 부담을 드릴 수 없어, 이를 실행에 옮긴 상주들의 마음씨에서 사람살이에서 지녀야 할 염치의 한 극단을 보게 된 것이 뜻 깊었다. 만약 또 한 번의 친상을 몇 년 시간의 거리를 두고 당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모르면 몰라도 상주나 조문객이나 당연히 부의금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각박한 현대생활일지라도 그래도 마지막까지 지녀야 할 염의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 사례라고 본다.

며칠 전에는 각별하게 지내는 문우 한 분이 장모상을 당했다는 부고를 받았다. 당연히 작으나마 부의금을 챙겨서 문상을 갔다. 그런데 방명록을 쓰는 접수대 바로 옆에 간결한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부의금은 받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의를 표하고 음료수를 마시면서 문우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런 안내문을 게재한 이유를 알만했다.

미수(米壽)를 맞은 해에 작고하신 장모께서는 딸만 둘을 둔 청상(靑孀)이었는데, 생전에 어찌나 근면하고 검약하셨던지 먹고사는 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재물도 장만했다고 한다. 유산을 물려받아야 할 상주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사위가 상주를 대신하여 조문객을 맞는 마당에 고인의 장례를 위하여 부의금을 받는다면 작고하신 장모님께 갚을 수 없는 부채를 드리는 격이 될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맏사위인 문우가 선도하여 이런 안내문을 내걸고 부의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연거푸 당한 친상에 부의금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은 조문객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는 상주의 염의가 발동된 사례라면, 뒤의 경우는 이미 망자가 되신 분의 처지까지도 고려하여 단행한 것이니, 이래저래 살아가면서 챙겨야 할 사람다운 도리는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날마다 염소의 뿔을 녹인다는 염천지절이다. 부산 영도다리 앞에 있는 한진중공업 85호 고공크레인에 지난 1월 6일 칼바람을 맞으며 한 여인이 올라갔다. 벌써 6개월을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다. 노동자에게 ‘일방적 해고는 살인’임을 뼈저리게 느낀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크레인에서는 2003년에 또 한명의 노동자 김주익이 129일 동안 혼자서 투쟁하다가 죽어간 곳이기 때문이다. 이번 투쟁은 희망버스로 사회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저 외롭게 혼자 죽어가게 하지는 않겠다는 사회적인 염치가 발동하고 있다.

척박한 현대일수록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다양한 몸부림은 중단할 수 없다. 상사를 맞아 부의금을 받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염의와 함께, 사회적 약자인 여성 인권과 노동자의 생존권을 죽음으로 외치는 목소리에도 사회적인 염의가 반응할 때 우리 사회는 훨씬 인간다운 삶의 사회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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