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치기와 자존심
새치기와 자존심
  • 유춘택
  • 승인 2011.05.0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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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자격요건은 국토나 인구, 국민소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지 않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단일민족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더더욱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잘살고 못살고의 기준이 행불행의 조건과는 무관하다는 것도 당연히 수용되어지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가정이 증가하고 있고 붕괴되는 사회구조 속에 기존의 질서는 옛것이 되어버렸다. OECD에 진입되어 글로벌 속에 엄청난 몸살도 앓고 있다. 혹자는 우리 스스로를 선진국으로 자찬하면서 긍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불현듯 어느 영화 속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용인즉,

“마사이족의 포위공격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마지막 피난열차를 타기위해 아비규환의 도가니 속에 빠진다. 보통 백인사회의 습관에 의하면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먼저 태우게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순서가 지켜질 리가 없다. 결국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들만 떨군 채 기차는 도망쳐 버리고 만다. 전통과 관습을 무시한 새치기가 인간의 생사를 결정지은 순간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선교사 이야기를 다룬 1930년대 영화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남겨진 사람들은 그대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온갖 지혜를 동원해서 마사이족의 포위망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외인부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그러나 백인들의 도시에 그들이 무사히 귀환했을 때까지 훨씬 먼저 출발했던 피난열차는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피난열차의 새치기 승객들 모두가 마사이족의 교묘한 함정에 빠져 남김없이 학살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생활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영화 속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과소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이와 달리 현실에 있어서는 당한 이들보다 새치기한 이들이 훨씬 득을 보는 수가 많다. 이를테면 공공시설물 이용 시 질서를 지키다보면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굴러야하는 일이 파다함을 본다.

무질서가 원칙이 되어버린 세상! 그래서 마침내 너도 나도 새치기를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버린 세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급하고 무질서한 과거의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또는 충분한 제도와 적절한 시설을 마련하지 않은 행정당국 때문이라고도 하고 농경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이 필요불가결한 공업사회로의 발전을 원인으로 본다. 모두 근거가 있고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다.

그러나 한 예를 들어 골똘히 생각해보자. 자정 무렵에 술 취한 사람이 길을 건너기 위해 건널목에 서있다. 교통경찰도 보이지 않고 오가는 자동차도 드문데 다만, 빨간 신호등이 그를 막고 있을 때, 취한 마음과 흐느적거리는 몸이 그를 그냥 서있게 만들지 않고 있다. 그가 만일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넌다면 그것은 무질서 의식 탓이며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푸른 신호등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그의 훌륭한 질서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준법정신 이전에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처녀항해 도중 빙산에 부딪쳐 침몰했던 대형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생각난다. 영화로부터 얻어진 기억이지만 그 위급한 순간에도 노약자와 부녀자부터 구명보트에 침착하게 옮겨 태우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명예심을 귀하게 여기는 자들만의 지혜로운 행동이었다.

군자는 대로행이라 하는데 빨간불을 소로에 비유한다면 푸른 신호등은 대로이다. 군자는 바로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푸른 신호를 사랑하며 산다. 새치기를 하지 않는 마음, 그런 비열한 행동은 아랫것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명예심이 팽배하고 자존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자존심을 지키며 명예심을 지니고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많이 대하게 된다. 새치기를 하는 이들을 보고 두려워하거나 오불관언(吾不關焉)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막아서서 그들의 자존심이 죽어가는 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계도하여 질서가 우선되는 밝은 사회로의 지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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