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라는 숫자
2라는 숫자
  • 최고은
  • 승인 2011.03.1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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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2라는 수는 현대 사회의 꽃이라고 말하는 컴퓨터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수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컴퓨터는 2진법이라는 구조 속에서 설계되었고 만들어진 것이다. 기수법으로서의 2진법은 가난뱅이에서 큰 부자로 되는 것과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20세기가 될 때 까지도 2라는 수는 별로 매력을 가진 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컴퓨터의 발명과 함께 2진법은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획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두 개의 기호로 수를 표현하는 2진법은 켜지거나 꺼지는 개폐기의 상태에 따라 모든 수의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때 2진 숫자(binary digit)라는 용어가 만들어진다. 우리 몸의 구조가 쌍(pair)의 체계로 만들어진 것에 착안한지도 모른다. 두 눈, 두 귀, 그리고 두 손과 두 발등이 모두 쌍으로 만들어져있다. 사람의 손가락이 모두 열 개로 되어 있어서 10이란 수를 사용하였지만, 사람의 손이 두개여서 원래는 둘씩 세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2와 같이 작은 수일지라도 2의 거듭제곱은 매우 빠르게 천문학적인 수에 도달한다. 은 겨우 4이자만, 은 1,000보다 크고 은 백만보다 크며 은 조 보다 큰 수가 된다. 모든 수를 단지 0과 1로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진법 체계의 발명자며, 역사상 위대한 수학자의 한사람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tz, 1646-1716)의 흥미를 끌었다. 사람들은 그를 수학적 사고에서 정 반대의 위치에 있는 두 가지 영역인 연속적인 영역과 이산적인 영역을 결합한 인물로 추종하고 있으며, 이른바 미분 적분학을 창시하여 무한의 개념을 유한으로 이끈 위대한 수학자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처음으로 2진법을 발명하였을 때 또 다른 위대한 수학자인 라플라스는 그의 2진법의 산술에서 창조의 형상을 보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라이프니츠는 1을 신으로, 0을 무로 해석하여, 모든 수가 이 두 기호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신이 무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를 창조하였다’는 기독교의 창세기 설화로 재해석하였다. 즉 수학적으로는 수의 표기법에 불과한 이진법이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는 절대적 존재인 신의 창조언어, 일종의 안무로 간주되었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를 이진법의 보편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 때에만 가시적 현실세계 저편에 있는 창조의 영상, 즉 완벽한 지식과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계산할 때 창조하였고, 창조할 때 계산하였다고 생각하였다. 2진법에서 모든 수를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신은 무로부터 모든 생명체를 만들어 낸다고 상상했다. 라이프니츠의 이진법 발상에서 중요한 점은 0 과 1이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개의 기호를 체계적으로 반복할 경우, 지금까지 10진법으로만 표현되었던 모든 수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고, 또 기존의 더하기, 곱하기 등 연산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체계적 발상에 있다. 우리는 이진법 연산이 현대의 컴퓨터 회로의 off와 on으로 물질화·기계화되어 어떤 문명사적 결과를 낳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진법의 계산적 측면보다 신에 의한 세계의 예정조화설을 제안한 기독교 사상가 라이프니츠가 중국의 주역과 그의 이진법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가 이진법의 철학적 해석에서 도입한 무란 무엇일까? 우리는 뉴턴이 그의 역학에 도입한,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 무로서 절대공간을 라이프니츠가 부정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이란 마치 가능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할 때의 이들 간의 질서였다. 다른 한편 라이프니츠는 신은 존재뿐 아니라 가능성의 원천이고, 신은 신에게 좋다고 생각되면 무를 채울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란 이와는 반대로 구체적 존재를 지각하기 전의 상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구체적 존재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추상되어 가능성의 영역에 속할 뿐이며, 결코 현실의 영역에 속한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1905년 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부정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라이프니츠는 이미 250년 전에 그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간파하였다. 다른 한편 현실성을 상실한 무란 우리의 상식적 사유방식에 반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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