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사태,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구제역 사태,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 김흥주
  • 승인 2011.03.02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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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시절이던 1981년 4월 어느 날. 강의실에서 선배들과 함께 몰래 돌려본 광주항쟁 기록 영상물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눈물, 콧물을 넘어 화장실에서 토악질을 해야 할 정도였다. 처음으로 인간이 잔혹하다는 것을 느꼈다.

30년이 지난 2011년 2월. 경기도 이천시의 한 돼지농장에서 진행된 구제역 살처분 장면을 담은 ‘생매장 돼지들의 절규’ 동영상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인간이 잔혹하다는 것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살아있는 생명을 그대로 매장해버리는 우리야말로 잔혹의 ‘종결자’ 아닌가 싶다.

더 큰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잔혹상 이면에 놓여 있는 불편한 진실들이다. 집권 여당 원내대표는 “수출을 20억원밖에 못 하는 축산업에 3조원을 퍼붓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구제역 사태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차라리 골치 아픈 축산 포기하고 값싼 수입산으로 대체하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정치권 의도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공교롭게도 구제역 사태 이후 쇠고기와 돼지고기의 수입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지난해 12월 이후 50% 이상 급증하고 있다.

2001년 2월 영국의 구제역은 사상 최악의 재앙이었다. 7개월 동안 살처분된 가축이 645만 6000마리, 가축을 잃은 농장이 1만 167곳, 정부 보상금과 방역비 등이 5조 1000억원, 농업생산 피해액 1조 6000억원, 관광부문 직접 손실액 5조 4000억원이었다.

이에 대한 영국의 대응은 진심으로 성찰하는 것, 그리고 사회적 합의 하에 정책을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먼저 소비자들이 먹을거리 안전과 보장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먹을거리야 말로 경제논리로, 개발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소비자들이 변하니 생산자들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더 좋은 먹을거리를 위해 소비자와 생산자가 연대하였고, 이를 통해 생산체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농업정책을 전개하였다. 구제역이 진정된 이후 바로 농식품부(MAFF)를 환경식품농촌부(DEFRA)로 개편하고, 구제역 사태의 성찰을 근거로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로컬푸드, 친환경 축산, 유기농업, 공공급식 등 대안농업체계에 주목하였다.

보다 장기적으로 영국 정부는 농업 ‘생산’ 정책을 ‘먹을거리’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생산자의 문제를 생산자와 소비자, 농촌과 도시의 연대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일례로 영국 런던은 2006년 런던 시장이 주관하고 ‘런던 푸드’라는 민관협의체에서 추진하는 먹을거리 부문 전략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는 시민들의 지역 먹을거리 사용을 증진하고, 정부가 학교급식을 포함한 공공 영역에서 지역 농산물을 우선 구매하는 방안을 기획하고 있다. 이를 통해 런던 주변 생산자의 생계를 지원하며, 시민들에게 안전하고 영양가 높은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는 대안먹을거리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체계가 구축되면 공장형 밀집 축산이나 대량생산 농산물을 고집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제역, GMO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포기하기 보다는 대안을 찾아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영국이 구제역 성찰에서 얻은 교훈이다.

어느 정부나 실패는 할 수 있다. 실패를 되풀이하는 정부와 그렇지 않은 정부, 실패를 책임지는 정부와 남의 탓으로 떠넘기는 정부가 있을 뿐이다. 영국 정부는 구제역에서 농업의 살 길을 배웠다. 우리 정부는 구제역에서 농업을 버릴 구실을 찾았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이다.

현 정권의 시장만능주의는 농업의 미래를 국내총생산의 2%에 불과하다는 돈의 무게로만 판단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한미 FTA 체결을 위해 미국산 쇠고기를 받아들이려다 촛불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지금 구제역 파동에서 또 다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 해 배추파동에서 보았듯이 “없으면 사오면 되고”라는 논리 때문이다. 식량 자급력 없는 국가는 미래가 없다. 지금은 수입할 수 있지만, 자급체계가 붕괴된 이후는 수입을 구걸해야 한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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