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의 이론
아벨의 이론
  • 최고은
  • 승인 2011.02.1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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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학이 어려울까? 어렵다는 선입견을 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방정식을 푸는데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2차 방정식과 3차방정식, 그리고 4차방정식은 이른바 근의 공식을 알기만 하면 기계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지만, 그러나 5차방정식 이상이 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물론 5차 방정식도 4차 이하의 식들로 인수분해가 되는 경우는 문제가 안 된다. 또 상반방정식이라고 말하는 -1=0이 되는 특수한 형태의 방정식을 풀 수 있다.

많은 수학자들은 16세기부터 거의 200년 동안 5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렇게 17, 18세기동안에 5차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을 찾기 위한 수학자들의 많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18세기 말에는 오히려 그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였고, 왜 4차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릴 수 있는가에 대한 반성하는 연구를 하였다.

이 연구를 단서로 하여 1824년 아벨(Niels Henrik Abel 1802-1829)은 일반적인 5차 이상의 방정식은 대수적으로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노르웨이의 수학자인 아벨은 2백년을 두고 해결을 못 본 오차방정식에 대하여 "오차 이상의 방정식은 대수적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므로 그의 수학에 대한 업적은 후세에 대수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크리스타니아 대학을 졸업한 후, 정부로부터 독일과 프랑스로의 유학을 명령받았다. 그는 그 이전에, 이미 5차 방정식의 해법이 불가능함을 증명했고, 또 타원함수에 관한 깊은 연구 업적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크랄레(A. L. Cralle, 1780-1855년)와 친교를 맺었으나, 가우스는 5차방정식의 해법이 불능이라고 증명한 그의 논문에 냉담했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1825년에 아벨은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초월함수에 관한 논문을 파리 학사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코시가 집에 두고 잊어버리는 바람에 발표되지 못했다. 그는 상심한 가운데 귀국했으며, 가정교사를 하면서 겨우 생활을 영위해 갔는데, 나중에 크랄레에게 베를린 대학으로 초청받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초청장이 도착하기 전에 그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 밖에 그의 업적으로는 급수론, 아벨함수론 등 최고도의 문제를 다룬 것을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벨은 수학자로 150년 동안 할 일을 했다'고 말해질 정도다.

크렐레는 아벨의 협력을 얻어 26년에 수학연구의 전문지인 순수수학 및 응용수학 잡지를 창간하고, 여기에 아벨의 논문을 게재하여 그 업적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아벨은 이어 프라이부르크, 드레스덴, 빈 등을 거쳐 이탈리아, 스위스, 파리로 갔으며, 그 동안에 아벨의 정리를 포함한 타원함수론을 써서 파리에 있는 프랑스 학사원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이듬해 27년에 베를린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도 고생스러운 연구를 계속하여, 타원함수론에 관한 우수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829년 1월 아벨은 신병이 악화되어 건강이 극도로 나빴으나, 프랑스 학사원에 제출했던 당시 아직 발표하지 않은 논문의 사상을 발전시켜 대수함수에 관한 아벨의 정리를 증명한 유명한 논문을 써서 베를린의 크렐레에게 보였다. 이 무렵에야 그의 업적이 수학계에 알려져 높이 평가되었고, 베를린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초대장이 도착되기 이틀 전에 아벨은 26세의 불행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이름은 아벨의 적분, 아벨의 정리, 아벨방정식, 아벨군 등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많은 수학용어 속에 살아 있어, 수학계 불후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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