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C 전태풍 "잘때 계속 생각해요, 태극마크요"
KCC 전태풍 "잘때 계속 생각해요, 태극마크요"
  • 신중식
  • 승인 2011.01.1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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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처럼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전태풍(31, 전주 KCC 이지스)을 만나기 위해 지난 7일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위치한 KCC 연수원 구단 숙소를 찾았다. 전날 밤, 전주에서 치른 연장 혈투의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는 않은 듯 보였다.

"어제 이겨서 다행이에요. 졌으면 오늘 기분 완전히 다운됐을 거에요"

아직은 우리 말 표현이 어눌하다. 말을 하다 자연스럽게 영어 단어가 튀어 나온다. 29년동안 미국인으로 살았던 그다. 토니 애킨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전태풍으로 살아간 지 이제 불과 2년째다.

누가 뭐래도 전태풍은 한국 사람이다. 스테이크보다 감자탕을 더 좋아하고 형-동생 위계 질서도 잘 구분한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형이라 부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단다. 작년 5월, LA에서 만난 어린 시절 친구 제인 미나 터너와 결혼식을 올린 후 신접살림도 용인시에 차렸다.

◈ "6살 때까지 영어 하나도 못했어요"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 LA에서 자란 전태풍은 어린 시절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외할머니와 주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먼저 접했다. 어머니가 차려주는 음식은 대부분 한식이었다. ‘홈(Home)'보다는 집이라는 표현이 더 편했고 스테이크보다는 불고기가 입맛에 더 맞았다.

"나 6살 때까지 영어 하나도 못했어요. 하나도 할 줄 몰랐어요. 아버지는 짜증났어요.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못했어요. 하나도 못했어요. 6살 때 영어 배우려고 특별 학교에 갔어요. 어렸을 때 조금 창피했어요. 나는 왜 영어 못하고, 친구들은 다 영어하고"

영어에 금방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 하나 있었다. 바로 문화 차이. 철저히 ‘한국 사람’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전태풍에게 미국은 너무나 낯선 세계였다.

"어렸을 때 문화적으로 이상했어요. 나 장난 많이 쳤어요. 그런데 미국 문화는 달라요. 사람 만지고 얼굴 만지는 장난, 미국에는 없어요. 나 방귀 뀌면 엄청 웃겨요. 미국 사람들은 재밌어하지 않아요. 이게 안 웃겨? 우리 가족은 똑같이 하면 너무 웃어요. 한국 쪽 느낌이 맞았고 미국 쪽은 조금 안맞았어요. 나 어렸을 때 아쉬운 느낌 있었어요. 나는 뭐 이상해? 난 이상한 사람이야?"

농구 선수로 활동했던 전태풍의 부친 주얼 애킨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아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농구를 매개체로 택했다. 전태풍은 7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농구를 배웠다. 농구는 그가 어색하게만 느꼈던 세상과 통하는 창이 됐다.

전태풍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미국 조지아주로 이사했다. 버크마 고등학교 졸업반 당시 조지아주 체육협회가 최고의 고교 선수에게 수여하는 '미스터 바스켓볼(Mr.Georgia Basketball)'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이후 농구 명문인 조지아 공과 대학교로 진학해 4년간 주전 가드로 이름을 날렸다.

◈ 태극마크를 향한 꿈을 키우다

작은 신장(178cm) 탓에 미국프로농구(NBA) 진출에 실패한 전태풍은 졸업 후 러시아, 프랑스, 터키, 그리스 등 유럽에서 활동했다.

그 곳에서 다양한 나라의 선수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유독 국가대표라는 단어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고. 국가대표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나라가 다시 머리 속에 떠올랐다. 어머니의 나라, 한국이다.

"친구들에게 많은 얘기 들었어요. 대표팀에서 뛰는 게 재밌고, 어떻게 연습하고, 다른 나라와 어떻게 경기하고, 경험을 많이 나눴어요. 나도 대표팀에서 뛰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 즈음 전태풍은 한국에 프로농구 리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기심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뛰고 싶다, 그리고 그 곳에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고.

"비디오 보고 유투브도 봤어요. 김승현, 방성윤 하이라이트 보면서 나 여기서 뛰고 싶다는 느낌 있었어요. 길을 열어준다고 했을 때 엄청 많이 반가웠어요"

KBL은 2008년 귀화 혼혈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는 한국인 피가 섞인 혼혈인을 외국인 선수가 아닌 국내 선수처럼 대우해준다는 소식에 주저없이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

30년 가까이 미국인으로 살았다. 국적 포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니, 힘들지 않았어요. 나 한국 사람이에요. (반대로) 미국으로 귀화하라고 해도 나한테는 똑같았을 거에요. 다른 나라, 필리핀이나 중국으로 귀화하라면 조금 아쉬웠을 거에요. 그 나라 사람이 아니니까요. 어머니도 많이 좋아하셨어요"

애킨스에서 전태풍이 된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바로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었다.

"나 잘 때 생각 많았어요. 태극마크 달고 아시안게임, 올림픽같은 큰 경기에서 뛰고 중국이나 유럽 나라들과 금메달 다투고. 이렇게 하고 싶고 저렇게 하고 싶고, 그런 생각 엄청 했어요. 내가 대표팀에서 뛰면 한국 농구 좀 다른데? 재밌는데?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 농구 알게 되고,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 눈물의 좌절 "올해는 꼭 태극마크 달 거에요"

전태풍은 2009-2010시즌 프로농구에 ‘태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전까지 볼 수 없었던 화려한 드리블과 개인기로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데뷔 첫 해 KCC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웠지만 시간만큼 좋은 약도 없었다.

전태풍은 2010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대표팀의 예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국제대회 규정상 귀화 선수는 오직 1명만이 출전 가능했다.

또 다른 귀화 혼혈 선수인 센터 이승준(서울 삼성 썬더스)과의 경쟁 끝에 전태풍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전태풍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한동안 소속팀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내가 이 정도 실력인데 왜 떨어져?"라는 억울함에 올 시즌 초반 평소보다 더 오버하다 허재 감독에게 크게 혼나기도 했다.

"유재학 대표팀 감독 스타일은 나랑 달라요. 나 수비 약한데 수비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거 때문에 나 대신 승준이 형이 가면 팀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수비 연습할 때 부상 때문에 컨디션이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게 아쉬워요. 많이 속상했어요"

눈물의 아픔, 그래도 꿈을 향한 도전에 포기란 없다. 올해 9월 중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 대회 출전이 목표다. "또 도전해야죠. 이제는 잘 때 올해 다시 대표팀 가는 거 계속 생각해요. 작년에는 여기는 대표팀이고 나는 KCC 선수, 그렇게 나눠서 생각했어요. 이제 대표팀 가면 나는 한국 선수라고만 생각할 거에요"라며 달라진 마음가짐을 드러냈다.

◈ "나를 한국 사람으로 봐줬으면…"

"허재 감독님한테 많이 혼났어요. 우리 어머니와 비슷한 느낌 있었어요. 조금 화나면 많이 혼내고(웃음). 나한테 거는 기대가 커서 그래요"라며 소속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전태풍은 갑자기 미소를 짓더니 "하승진도 도움 많이 줘요. 이상한 말 가르쳐줘요. 나 괴롭게 하는 사람 있으면 귓방망이 맞을래? 라고 말하래요"라고 전했다.

때마침 인터뷰가 진행되던 숙소 로비에 하승진이 난입(?)했다.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잘하는 것도 없는데 무슨 인터뷰?"라고 놀리자 전태풍은 주저없이 "귓방망이 맞을래?"라고 외쳤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웃었다.

가족같은 팀 분위기 설명에 열을 올리던 전태풍,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금세 풀이 죽었다. 대체 왜? 2012년 5월을 끝으로 KCC를 떠나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기분이 '다운'된 것이다.

귀화 혼혈 선수는 한 팀에서 3시즌만 뛸 수 있다. 이후 자유계약선수(FA)가 되어 반드시 타 팀으로 이적해야 한다. 국내 선수와는 달리 재계약이 불가능하다. 10개 구단의 전력 균형을 위해 마련한 장치라는 게 KBL의 설명. 그런데 전태풍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다른 팀 가면 너무 아쉬울 거에요. 그거 문제에요. 나 귀화했어요. 나 잘못하면 한국 사람처럼 똑같이 교도소 가야돼요. 그런데 KBL은 나를 한국 사람처럼 안 대해요. 난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왜 FA할 때 다른 팀으로 가야 하는지 이해 못해요. 조금 열받아요"

제도 보완의 필요성에 대해 필자도 공감하면서 화제를 바꿔봤다. 대표팀 승선, 프로리그 우승 외에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을까. 전태풍은 한국 농구의 문화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

"다른 나라 보면 1대1 공격이나 화려한 기술 많이 나와요. 한국 많이 안나와요. 패스, 패스, 컷인, 팬들은 조금 재미없어요. 남들과 똑같이 하면 안되요. 기술을 키워야 돼요. 그래서 나 은퇴하면 고등학교에서 감독하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키우고 싶어요" 국가대표의 꿈을 안고 한국 땅을 밟은 전태풍, 그는 벌써 한국 농구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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