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일송 장현식 선생
애국지사 일송 장현식 선생
  • 조금숙
  • 승인 2011.01.0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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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장현식 선생은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강물처럼 도도하게 일생이 흘렀갔습니다. 참된 선비 장현식은 전북 김제군 금구면 상신리에서 나셨습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시고 독립 활동 지역은 서울 명륜동이었습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애국지사 장현식 선생은 6.25 직후 북한으로 납북 되어 평양에서 별세 하셨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은 연좌제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격여야 했고 결국 선친이 지내던 고택을 전주시에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4월 비밀 결사인 대동단 (大同團)이 창단되자 군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 발행의 재정운영을 담당했다가 체포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았으며 민족어 (民族語) 보존을 염원하고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하여 3000원을 제공하며 지인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였다가 재판을 받는 등 4년간에 걸쳐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된바 있습니다.

그 당시 독립운동의 비밀결사대 명칭은 ‘조선민족대동단’이었고 이극로 등 36인의 판결문 참조문헌에 는 전라북도 김제군 김제면 상신리 90번지 재적 경성부 계동 139번지 거주 농업 장현식 26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장현식 선생은 1896년 김제군 상신리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장현식 은 일지기 중앙고보( 현 중앙고등학교) 건축을 위해 거액의 건축비를 기부했으며 특히 인재양성에도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사례들이 확인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대학교 설립 당시에는 재단에다 자신의 사재를 기부하여 우리 민족의 침체된 교육을 부흥시키고자 실천적 의지를 폈던 흔적들이 뚜렷했습니다 동아일보 언론사를 창간할 당시에도 값비싼 인쇄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여려 차례 보도된 바 있습니다.

이 외에도 창씨개명에 분노하여 우리말 찾기 위한 조선어학회 사건에도 자금을 지원하는 등 우리 민족이 항일운동을 하는 분야는 다양한 방법으로 구국운동 과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애국 지사입니다.

장현식은 장태수를 종증조(從曾祖)로 모셨습니다. 장태수는 병조 참의 동부승지 춘추관 수차관등을 지낸 훌륭한 조상을 두었으니 그 뿌리의 명가는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집안이었습니다

대표적 항일 의사 장현식은 안동장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나 호남평야의 만석꾼이지만 시대가 흐르고 그 후손들은 생가 복원이 어려워 전주시 한옥마을에 부친의 민족혼이 깃든 생가를 넘겨야 할 때 그 심정은 오즉했을까?

최근에는 우리 정부가 주권을 회복하지 못했던 어려운 시기인 상해 임시정부시절에 중국의 동북지방에 주둔해 잇던 독립군대에 쓰일 독립운동자금 수만 원을 기부했던 놀라운 새로운 사실들이 최근 밝혀지면서 당시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산실 장현식의 고택을 옮긴 전주시 한옥마을 동헌 풍락헌 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문틈 사이로 겨우 들여 다는 보았지만 장현식 고택은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후손들은 비운을 탓하거나 지방자치단체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쓰러져가는 고택을 뒤늦게라도 양지바른 터 동헌 옆에 세워준 것만으로 만족하다 합니다.

조상들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조상의 위업을 이어받아 후세에 교훈으로 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도 값진 일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처우와 예우가 미흡한 것은 사실입니다.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강물처럼 도도하게 살았던 일송 장현식의 애국활동의 소중한 사료들을 장현식의 장남 장홍씨가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우리 지역 출신의 훌륭한 독립 운동가를 재조명하는 사업 전라북도 광복회의 몫이라 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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