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추가)어진화가 채용신­①그는 누구인가
(사진 추가)어진화가 채용신­①그는 누구인가
  • 하대성
  • 승인 2010.12.28 13: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50∼1941)은 전북이 낳은 조선시대 최고의 어진화가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을 가리킨다.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채용신. 그는 지금 안내판 하나 없는 익산 왕궁의 이름없는 야산에 쓸쓸히 잠들어 있다. 화려한 옛 명성과 견줘보면 사뭇 가슴 아픈 현실이다. 채용신은 사진처럼 정밀하고 섬세한 ‘석지필법’을 창안했고 고종 어진을 비롯한 이하응, 최익현, 황현, 최치원, 김영상, 전우 등 100여 점의 초상화를 남겼다. 또한, 화조화, 산수화, 영모화 등에서도 화명(畵名)을 떨쳤다. 하지만 그의 예술혼은 최근까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관심과 연구가 미진한 탓이다.

2011년 올해로 석지 탄생 160주년, 서거 70주년을 맞아 전북도민일보는 그의 생애와 작품정신, 화법 등을 재조명하는 <어진화가 채용신>을 신년기획 보도한다. 더불어 채용신 전시회와 학술대회를 통해 역사적, 미술사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새로운 평가작업을 벌인다. 또한, 기념사업회를 구성해 미술대전 개최와 미술관 건립 등 다양한 기념사업 추진을 모색한다.

‘연전에 높은 구중궁궐에서 임금을 모실 적에, 나의 호를 바꾸어 내려주사 송구스러운 느낌 남아있네. 특히 ‘강’(江) 이름을 가리켜 깨끗한 경치로 허여하시고, 그대로 ‘석(石)’ 글자를 남겨 두어 절개가 굳다고 논하셨다. 남은 인생 어찌 시선(詩仙)의 취미를 본받겠는가? 노쇠함에 따라 성주(聖主:고종)의 은혜를 잊지 어렵도다. 지난 일 지금에 흘러간 물처럼 탄식되는데, 종남산(終南山:남산) 빛은 저녁 구름에 어둡구나.’ 석강이라는 호를 내린 고종황제를 그리워하며 읊은 것으로 석강실기(石江實記)에 수록된 채용신의 시이다.

채용신은 본관이 평강(平康)이고, 본명이 동근(東根), 아명이 용덕(龍德)이다. 호는 석지(石芝) 석강(石江) 정산(定山)이다. 석강은 아버지가 통정대부 돌산진수군첨절제사를 역임한 채권영(蔡權永1828-1901)이고, 어머니가 밀양박씨(密陽朴氏 1825-1900)이다. 형제는 3남이고, 그 중에 장남으로 1850년(철종 1년) 2월 4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석강의 조상은 완산(完山-전주)완전방에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 가선대부(嘉善大夫) 홍순(弘淳)이 한양 삼청동(三淸洞)으로 이사해 석강은 여기에서 태어났다.

석강은 어려서부터 즐겨 그림을 그렸다. 15세가 넘어서자 산천,초목 등 그렸는데,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면서 세필채색화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며 22세(1871)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초상화를 그렸다. 31세(1880)에는 13세 아래인 전주 이씨 용화(龍華 1863~1929)와 만혼해 5남 3녀를 두었다.

1886년에 37살의 늦은 나이에 무과(武科)에 합격하고 1891년 의금부도사, 1893년 부산진수군첨절제사가 되었다. 이 때 군복을 입고 의장을 든 자화상을 그리고 <수군첨절제사 채용신 사십세상(水軍僉節制使 蔡龍臣四十歲像)>이라는 화제(畵題)와 계사추칠월상한모사(癸巳秋七月上澣摹寫)라는 낙관을 썼다. 1896년에 돌산진수군첨절제사로 부임하여 무관으로서 마지막 직책을 맡았다.

1900년 석강의 나이 51세에 일생의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종(高宗)은 이태조(李太祖)의 어진(御眞)을 옮겨 그리고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하려고, 고수(高手) 화사(畵師)를 뽑는다. 의정부 찬정 민병석(閔丙奭)이 채용신을 추천하자,고종은 그날로 전라도 관찰사에게 칙서를 내려 소환하게 하였다. 석강은 정월 초7일에 모사청(模寫廳)에 당도하여 여러 화사와 시험을 치르고 조석진(趙錫晉 1853~1920)과 함께 주관화사로 발탁되었다. 곧이어 함경도 영흥 준원전(濬源殿: 조선의 발상을 기념하는 전각)으로부터 저본이 될 태조어진이 흥덕전(興德殿)으로 이안되고, 2월19일부터 모사하여 4월 6일에 완성되었는데, 채용신의 필치에 온 조정이 놀랐다고 한다. 이때 공로로 칠곡부사(漆谷府使)에 임명됐다.

그러나 그해 8월 20일에 선원전 7실(七室)이 불이나 어진이 소실되자, 고종은 채용신을 불러 다시 그리게 하였다.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모사했다. 1901년 정월에 다시 입궐하여 중화전(中和殿)에서 고종의 어진 제작에 들어가 4월에 마쳤다. 또 고종의 명령으로 공경(公卿) 16인의 화상을 그렸다. 이 해 9월 아버지의 상을 당해 장암(익산군 왕궁면 장암리)으로 돌아왔다.

1904년 12월에 탈상하자 정산 군수에 임명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 2품으로 승진되었다. 이때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사사(師事)하게 되어, 이 만남을 계기로 최익현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1906년 4월에 정산 군수를 끝으로 관원 생활을 접고 금마로 낙향하였다. 이후 익산, 변산, 고부, 나주, 칠보 등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 주었다. 61세(1910)에는 대부분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렸다. 임병찬(林炳贊) 윤향식(尹恒植) 김직술(金直述) 김영상(金永相)의 초상을 그려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1911년에도 전우(田愚) 황현(黃玹)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65세(1914)에는 어진 제작에 참여한 시말을 기록한 봉명사기(奉命寫記)를 짓고 뒷부분에 나라가 망해버린 비통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온 편지나 시문 등을 모아 전정산군수채공이력실기(前定山郡守蔡公履歷實記)를 썼다.

68세(1917)에는 뜻하지 않은 일본 여행을 하였다. 초상화를 잘 그린다는 소문을 들은 일본 귀족들이 초청하여 총독부 관리 이토오 시로오(伊東四郞)의 안내로 억지여행을 하였다. 이때 러일전쟁의 승전 장군인 노기 마레스케 (乃木希典) 대장의 초상을 비롯하여 오오쿠마 시게노부(大외重信) 백작상, 고토오 신페이(後藤新平) 등의 초상화 45점을 그렸다고 한다. 동경에서 영친왕을 만나 망국의 한을 나누고 고종황제의 어진을 전하기도 했다. 69세(1918)에는 김제의 갑부 곽동원상을 그렸다. 이 때부터우국지사뿐만 아니라 여러 신분의 초상화를 만들었다.

73세(1922)에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여 천황모독죄로 체포돼 군산형무소로 이감되던 중 만경강 사창진에 빠져 자결하려던 일화를 소재로 김영상투수도(金永相投水圖)를 그렸다. 75세(1924)에 최치원상(崔致遠像)을 2점이나 그렸고, 1926년에는 황희상(黃喜像)을 이모했다. 80세(1929)에는 부인과 사별하였다. 만년에는 손자인 규영(奎榮)과 합작하기도 하였는데,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일종의 공방(工房)을 정읍에 차려 놓고 광고를 내면서 초상화를 주문 제작에 나섰다.

1941년 6월 4일에 석강은 92세로 무장과 화가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묘소는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 채씨 선산에 10대조 인필(仁弼)을 비롯해 조부 홍순, 부친 권영의 묘 근처에 안내판 하는 없이 쓸쓸히 자리하고 있다. 석강은 서울 화단에서 활약하지도 않았으며 도화서 화원도 아니었지만, 어진화가였으며 100여점의 초상화를 남긴 역대 최다작의 화가였다. 그에 대해서는 한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이 더 높이 평가하여, 그의 사후 2년 만인 1943년 6월 4일에서 10일까지 ‘고석강채용신씨유작전(故石江蔡龍臣氏遺作展)’이라는 전시회가 서울 화신화랑에서 열렸다. 석강 서거 60주년 기념으로 2001년 6월 27일에서 8월 26일까지는 ‘석지채용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에서 60여점이 출품되어 열렸다.

석강은 관원으로 치적이 훌륭하였으나, 명예를 드날린 것은 관원보다 화가이다. 우국지사를 그림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지방화단의 인물로서 전신사조(傳神寫照:정신을 화면에 투영하는 일)를 구현했다. 그는 ‘일호불사 변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털끝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이라는 한국 초상화의 명제를 지킨 화가였다.

글·사진=하대성기자 haha@

사진설명1­-원광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종황제 어진(137*70㎝). 20세기 초 견본채색으로 석지의 작품이다. 일월병풍도를 배경으로 익선관,곤룡포를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무릎 사이에 ‘임자생갑오등극’(壬子生甲午登極)이라고 정묘하게 쓰인 호패가 보인다.

사진설명2-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이 익산 왕궁 야산에 있는 석지의 묘와 비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