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마중물
  • 이한교
  • 승인 2010.09.2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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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시작부터 수도가 고장 나 쩔쩔매는 안식구를 보며, 한 바가지 물이 마중물이 되어 맑고 시원한 물을 ‘콸콸’ 쏟아 내던 작두샘이 문득 생각이 났다.

어린 시절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심부름을 하였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추운 겨울이면 두레박 끈이 꽁꽁 얼어붙어 싫은 기억도 있다. 줄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가지랑 대에 갈고리를 매달아 두레박을 건져 내는 일도 귀찮았다. 가끔 도르래 두레박질을 할 수 있는 마을 공동우물에 가 물심부름을 하곤 했다.

40여 년 전의 얘기다. 어머니는 두레박이 낡아 구멍이 나면 봉동장(오일장)에 가셨다.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그때만 해도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어머니를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따라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장날이면 구경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졸라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여름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내 검정 고무신을 챙기셨다. 대나무 가시(작은 대나무를 낫으로 싹둑 잘라낸 끝)에 찔려 찢어지고, 뒤꿈치가 달아빠져 구멍이 난 신이다. 이 신발을 때워야 하므로 울고불고 따라나서질 않아도 장에 따라갈 수가 있었다. 장터에 도착하자마자 고무신발을 때우는 곳에 지키고 앉아 있으라 했지만, 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시장통을 따라다녔다. 머퉁이를 먹으면서까지 말이다. 기억으로는 옛 시골 오일장은 지금의 백화점처럼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마 대부분 주민이 장날에 생필품을 교환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얻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도 머리에 이고 오셨던 보리쌀과 달걀꾸러미를 파신 돈으로, 튼튼하고 실한 두레박을 골라 사셨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고 서 있는 내게 선뜻 얼음과자(아이스케이크)를 사주셨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발가게에 들러 그 비싼 검정 운동화까지 사주셨으나, 더위에 짜증을 부리니 신발가게 앞마당 샘으로 질질 끌고 가셨다.

바가지에 물을 퍼주시며, 먹지 말고 작두샘에 부으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작두처럼 생긴 손잡이를 힘 있게 잡고는 위아래로 저었다. 그러고는 웃옷을 반강제로 벗기셨다. 맨바닥에 엎드리게 하시더니 작두샘 주둥이를 등위에 대고 작두질을 하셨다.

“어떠냐! 시이원 하제…” 신경질을 부렸지만, 그 시원함이 지금도 생각난다.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그리 신기할 수 없었다. 빠르게 작두질을 할수록 시원한 물이 나왔다. 수동펌프였다. 전기도 필요 없고 힘을 쓰는 만큼 물을 얻을 수 있는 친환경적이고 과학적인 물 공급 장치였다.

지금처럼 상수원에서 일괄적으로 정수시설을 거쳐 가정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시설에 비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 두레박이 필요 없는 작두샘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샘에도 처음 물을 퍼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중물이라는 게 필요했다. 이 마중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얘기하려는 것이다.

이 마중물이 없으면 새로운 물을 구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고맙고 귀한 처음 물이 마중물이다. 자신을 버리는 희생이 있어야 가족이 살고 이웃과 나라가 산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얄팍한 생각으로 마중물을 허드렛물(권력 다툼)처럼 낭비한다면 새로운 물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껴야 한다. 개인의 소유물처럼 함부로 해서도 안 되며, 사용 후 또 다른 마중물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귀찮다 하여 빈바가지(빈 양심)로 비워 두는 무책임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모두가 파멸되거나 지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마중물은 어머니다. 꿈이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여자)는 힘의 원천인 마중물이었다. 17세 이하 어린 소녀들이 관심과 지원 없는 악조건에서 세계를 제패한 것은 인내와 땀을 마중물로 삼았기에 가능했듯이, 나라의 어른인 국무총리 후보자가 청문회를 통하여 스스로 맑은 마중물로 거듭나길 희망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진정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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