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순 수필가> 9월에 낙엽처럼 떨어저간 친구(2)
<임광순 수필가> 9월에 낙엽처럼 떨어저간 친구(2)
  • 한성천
  • 승인 2010.09.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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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0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전주에서 출마했을 때 어느 날 선거사무실로 쓰는 여관에 재식이가 나타나 일필 휘호를 던져주고 갔는데 그 내용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다. 그는 서도에도 일가를 이루어 친구들 문패를 써주길 좋아했는데 나는 그의 휘호를 선거사무실에 붙여 놓았다가 뜯어내어 수십 년을 보관했던 것을 이번에 광진이에게 삼산의 낙관을 찍어 오도록 맡겼다.

재식이는 본래 완주군 초포면 백동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조양이다. 백동리는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우아동이 되었는데 전고 2학년 재학시절 재식이 집은 농고 앞 인후동으로 이사했고, 그 집은 당대 악동들의 아지트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버린 전철환 소병일 이한구 등과 한상석 이수호 임운섭 이형로 등이 모여 ‘선우회’라는 이름의 클럽을 만들고는 인근의 친구 집들은 물론 전고의 교정에까지 출몰, 닭서리를 하는 등 장난꾸러기의 선두에 섰었다. 특히 학교 운동장 구석에 망치고 키우던 거위만한 닭을 훔쳐다 삶아 먹은 거사는 지금도 친구들의 추억담 속에 백미이다.

졸업 후 동창들은 퇴근 후 주로 술 마시러 모이는 ‘짠본부’(진견규의 안경집)와 고스톱을 즐기는 ‘쬐본부’(유형열의 미림양복점)로 나뉘었고, 김우식군의 비사벌에 회관이 마련되자 재식이는 이곳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언제던가 내가 전주에 들러 회관에 갔었는데 그날도 예외없이 방안에 가득 동창들이 모였고 패를 나누어 고스톱판을 벌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경찰들이 몰려 들어왔다. “그대로 계십시오. 움직이지 마세요” 날카롭게 소리치는 경찰을 보면서 임재식군 등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병풍역이었던 나에게 전경이 가까이 와서는 “태형이 아버지 아니세요.” 그런다. 이때 임형재 경위가 나설 수 밖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한쪽으로 지휘자를 데리고 간 임 경위가 동창회의 성격과 도박이 아니라는 설명을 하자 지휘 경찰은 “그럼 신고를 마셔야죠” 투덜거리고는 그냥 돌아갔다.

그 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친구의 부인이 남편이 매일 늦게 들어오고 동창회관에서 노느라고 그랬노라 핑개를 대니까 홧김에 파출소에 전화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는 것, 모두가 실소하고 지나갔다. 지금은 진견규도 유형열이도 모두 저 세상으로 가고 추억만 남아 낙엽처럼 뒹군다.

임재식이는 30대 후반부터 당뇨로 고생했으나 별로 가릴 것 없이 지내온 몸이었고, 글씨를 쓰고 그림도 챙기면서 한잔 술에 거나하면 노래 한가락을 부를 줄 아는 풍류객이었다. 93년 그가 서울대병원으로 와서 최후의 투병을 시도하던 때 나는 재식이를 찾았고 병상의 친구는 담담하게 웃으며 배를 손수 깎아 내놓았다. “나 전주로 내려 갈티어” 그것이 삼산 임재식이 나에게 준 마지막 말이 되었다.

무심한 일월은 살같이 흘렀고 나는 김덕룡 의원 캠프에서 삼산의 둘째 공진이를 만났다. 지금은 정가를 떠나 태건종합상사의 대표이시다. 우리가 고희를 맞은 해던가 카톨릭교구청 행사를 보고 나오는 길에 예쁘게 생긴 아가씨의 인사를 받았다. ‘임재식의 딸’ 희정이었다.

지금은 이름을 ‘현정’으로 바꾸고 LUIELLEE HAT CULTURE CENTER의 메니져로 활동중이란다. 임재식군은 나와 똑같이 3남1녀를 두었다. 막내 용기는 씨디네트웍스의 잘 나가는 상무다. 1994년 재식군의 아들과 딸들은 아버지의 삼산(森山)의 유필을 모아 ‘한심록(閑心錄)’을 펴내 탈상에 온 조문객들에게 나누었다.

酒香留客注 詩好帶風吟 ( 술이 향기로우니 손을 머물게 하여 따르고 시가 좋으니 바람에 띄어 읊다.)

고인의 삶을 그린 듯한 이 한 편의 시를 고르면서 삼가 삼산 임재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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