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순 수필가> 9월에 낙엽처럼 떨어저간 친구(1)
<임광순 수필가> 9월에 낙엽처럼 떨어저간 친구(1)
  • 한성천
  • 승인 2010.09.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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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돌아가신 아버지(故 森山 林載軾)를 많이 생각합니다. 3남1녀를 잘 키우셨는데, 벌써 별세하신지 17년이 지나 곧 20주기가 되어갑니다. 1993년 9월13일 당시 56세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고 볼 수 있죠.」

고 임재식군의 큰아들 광진이가 나에게 보낸 이메일의 한 구절이다. 올 여름에 할아버지와 조선어학회사건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던 나는 장현식 공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장공과는 사가의 연이 있고 뜻을 같이 한 동지였던 할아버지는 그 분의 권유로 조선말사전 편찬에 당시로는 큰 돈인 1,400원을 성모씨와 조모씨 등과 함께 갹출, 이를 장현식씨를 통해 전달했고 따로 김양수 공에게 100원을 보낸 명함 영수증이 지금껏 남아 옛일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장현식 공의 큰 아드님 장홍 선생과는 그 전부터 알고 지낸 처지였으나 근래에 뵌 적이 없었는데 그 분이 조선어학회사건 때 13세로 당시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셔 모시고 전말을 들어 거증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장홍 선생의 처남이 송기상 선배요, 송 선배의 처남이 신건 의원이라 전라도 인척의 줄은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한다는 이야기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송선배를 모시고 전주 송천동 한양아파트 장 선생댁을 찾아 나섰다. 82세의 장 선생님은 병후의 기력이 쇠하여 행보가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으나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소환통지를 보내고 연행하기는 정읍경찰서였다고 들었다. 조부님께서는 홍원경찰서에 끌려가셔 추위 속에 20일 넘게 고생하셨다. 일경들은 조부님의 의관을 벗겨 이를 짓밟고 상투를 잘라 그 꼭지로 재기를 찾다. 드디어 방면되었을 때 난발의 조부님을 보고 기차 속의 왜경이 수상하다 싶어 이유를 묻더니 ‘빠가야로’ 무사의 목을 칠망정 ‘마게’를 자르지 않는 법이다”하면서 분개하더란다. 아버님께서는 당신 까닭에 조선어학회에 관련을 갖고 고초를 겪으셨다며 미안하게 생각하시었고 일제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일의지를 불태운 계산공을 존경하셔서 해방의 기쁨 속에 전북 2대 지사로 부임하시고는 정읍 산외로 임공을 찾았고 함께 나가 일하자고 권유했으나 이를 사양하시자 고창고보 재학시절 역시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은 임공의 차남 임석현을 도청에 차출하셨다.”

또렷한 기억으로 증언을 한 장홍 선생을 모시고 산외면 평사리 우리 집을 둘러보자는 나의 제의에 흔쾌히 응하신 장홍선생님은 병환 중이신 사모님까지 함께 가자며 큰 따님과 처제분이 부축하도록 조처하였다. 차편을 마련한다며 “임서방에게 연락하라”는 말씀을 쫓아 나타난 장홍선생의 사위가 바로 임광진이오 재식이의 큰아들이었다. 전주시 동서학동 동장으로 재직중인 광진군은 장홍선생님의 따님 미경과 결혼 일송 장현식공의 손녀사위가 되었으니 세상이 얼마나 좁고 인연의 얽힘이 또한 이러하다 싶어 반갑고 소중했다.

스스로 오목서생(五木書生)을 자칭하여 삼산(森山)이라 자호한 임재식,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여기를 즐겼으면서도 전북도의 보건위생과장이란 중책을 9년씩이나 맡아낸 그의 뛰어난 능력과 훈훈한 인간을 친구들은 사후 17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 기억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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