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수학자 에미 뇌터
여성수학자 에미 뇌터
  • 김장천
  • 승인 2010.09.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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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의 창시자인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한 여성 수학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1935년 5월 5일에 발간된 뉴욕 타임즈에 실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여성이 다름 아닌 현대 추상 대수학의 창시자 에미 뇌터이다.

뇌터는 20세기가 초반에 남성들의 독무대인 독일 수학계에서 많은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여 20세기의 위대한 수학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녀는 괴팅겐대학에서 강의하며 연구하는 중에 1930년대 초반에 나치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1933년에 괴팅겐대학에서 쫓겨나 미국에 정착한지 2년이 채 되지 못한 1935년 4월 14일에 5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에미 뇌터는 독일 남부 지방의 조그만 도시 에르랑겐에서 1882년 3월 23일에 유태인이었던 부모인 막스 뇌터와 아이다 아말리아 카우프만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뇌터는 어린 시절 특별히 수학적인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다. 10대 때의 그녀는 음악과 춤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집안 청소와 요리를 배우며 다른 소녀들처럼 춤추는 것을 배우던 뇌터는 여성을 과학으로부터 소외시키던 장벽에 조그만 틈새가 열리기 시작할 무렵 막 수학의 현장에 입문하였다. 아버지는 유명한 수학자로 틀림없이 그녀를 후원했을 터인데, 이러한 아버지의 후원은 그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발간된 책자에는 에미 뇌터를 막스의 딸로 기록했지만 나중에 발간된 책에는 막스가 에미 뇌터의 아버지로 기록되었다.

에미 뇌터는 대수기하학자 막스 뇌터의 딸이며, 동생도 이론물리학 교수였다. 에미 뇌터는 에를랑겐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후에 괴팅겐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22년 괴팅겐대학교 교수가 되어, 19세기의 수학으로부터 현대 수학으로의 과도기적인 추상대수학을 추진하여 D.힐베르트, 바일 등과 함께 괴팅겐대학교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918년 발표한 가환환의 이데알론으로 이른바 뇌터 환을 정식화한 것을 비롯하여 데데킨트환의 분석, 판별식 정리의 연구를 하였으며, 비가환대수의 연구로 다원수론을 전개하여 접합적 갈루아이론, 국소유체론과 추상대수학의 중심 과제를 거의 포괄하는 업적을 남겼다.

에를랑겐-뉘른베르크대학은 여성이 등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수업을 들을 수는 있었다. 결국 1904년, 에를랑겐-뉘른베르크대학이 여성의 등록을 허용하자, 뇌터는 즉시 수학과 학생으로 등록되었다. 그녀는 1907년 파울 고르단의 아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즉시 그녀는 그녀의 출판물들로 인하여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녀는 1915년 독일의 괴팅겐으로 이사하였지만, 괴팅겐 대학은 그녀가 강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친밀한 동료였던 다비드 힐베르트는 뇌터의 이름 대신 그의 이름으로 된 강의를 뇌터가 맡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그런 강의들을 선전해 주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대학 내에서는 논쟁이 생겼는데, 그녀가 강의를 맡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국가의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들이 여성의 발아래에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는 처지를 깨달았을 때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물으며 그녀를 공격했다. 대학에 그녀가 교수가 된다는 것은 대학 평의원회에 그녀의 투표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대해 힐베르트 교수는 "교수 후보자의 성별이 그녀의 교수 자격을 허가하는데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대학 평의원회는 대중목욕탕이 아니다." 라고 항변하였다.

결국 1919년 그녀는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뇌터는 나치 인종 차별법에 의하여 학부 강의를 맡는 것이 금지되었고, 1933년 그녀는 독일에서 탈출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브린 마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1935년 4월 14일에 의문스러운 상황 속에서 죽었다. 그녀의 의사는 그녀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고, 그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브린 마르의 대학 휴일에 수술 일정을 잡았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이유로 그녀는 수술직후에 죽었다. 뇌터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미국에는 그녀의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뇌터는 브린 마르 대학의 캠퍼스에 위치한 토마스 그레이트 홀의 안뜰에 묻혔다. 그녀의 남동생인 독일 수학자 프리츠 뇌터는 1934년에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탈출했다. 그러아 그 역시 1941년 10월 10일, 소비에트 연방의 도시인 오룔에서 반 소비에트 선전 활동을 했다는 죄로 총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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