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미덕은 존재하는가?
우리 사회에 미덕은 존재하는가?
  • 김우영
  • 승인 2010.08.2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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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세기 동안 근대화의 가치들에 매몰되어 달려오는 동안, 우리 사회는 상전벽해식으로 변했다. 삶의 수준과 사회적 조건들에 있어서는 많은 향상이 있었다. 한 세기 전에 있었던 신분의 차별과 경미한 범죄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같은 비합리적 제도들은 철폐되었다. 선진국의 구호물자를 기다리던 가난의 상태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이 복지 제도의 도움을 받고 있고, 어느 정도의 물질적 풍요와 자신이 선택한 인생 계획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존중받고 있다. 한 세기 전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윤리적 조건의 비약적인 향상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 간의 관계에 기초한 미덕들로서의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이제 더 이상의 진보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공적 사적인 삶에서 옳은 일을 실천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는가? 누군가에게 그릇된 일이 행해지는 데에 분노를 느끼는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나무라며, 나아가 희생자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감싸는가? 대의에 자신의 열정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는가? 자신의 의무와 책무에 대해서 양심적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자면, 지난 과거와 비교 하여, 현격한 차이가 있다.

대의에 대한 헌신, 불의에 대한 분노, 자기 희생과 같은 도덕적 미덕들은 이제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도덕적 열정의 시대는 민주화, 자유 시장주의화와 함께 종말을 고하고 있다. 대신에 이기주의와 도덕적 냉소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유 시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일자리를 얻고 유지하는 것, 개인의 사생활이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자신의 몸과 정력, 건강, 아름다움이 어떤 관심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개인의 성공은 무엇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성공은 그의 능력을 보증하는 것이다.

개인의 성공의 요소에서도 개인의 미덕들은 더 이상 존중되지 않는다. 성실성, 정직, 배려보다는 타인을 다루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 개인 사이의 신뢰도 이제 기대하기 힘들다.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 친구 사이의 신뢰도 찾기 힘들다. 교사도 정치인도 이제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친구도 교사도 정치인도 필요가 아닌 선의로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다. 경찰관도 선의에서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선의에 호소하는 것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선의를 행하는 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단지 전문가 또는 복지기관이 하는 일일 뿐이다.

과거와 달리, 개인 간 관계에 기초하는 미덕들이 점점 상실되어 가는 우리 사회는,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물질적 재화의 분배와 사회의 윤리적 조건의 변화와는 달리 황폐화되어 가는 개인 간의 관계에서 그려지는 사회의 모습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일까?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웃과의 관계의 현주소는 무엇인가? 과거 어린 시절, 이웃집 아저씨는 나에게 항상 관심을 보여주는 감시자이자 든든한 보호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웃집 아저씨가 인면수심의 성폭행 살인자로 돌변하는 상황에 자주 직면하고 있다.

이웃 관계의 변화된 이미지에 대한 반성의 사례는 최근 극장에서 상영되는 “아저씨”라는 제목의 우리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몰두하는 군상들이다. 마약밀매, 장기밀매, 개미굴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탈법의 거대한 실체들이다. 거대 조직의 힘 앞에서 가난한 개인 존재는 수탈과 장기 탈취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갖거나 선의를 베풀지 않는다.

영화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 속으로 원하는 이웃집 아저씨의 상을 드러내 보인다. 마약, 장기 밀매단에 의해 납치되는 이웃 모녀, 특히 어린 소녀의 구원 요청에 별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직 특수공작원으로 그려지는 아저씨는 혼자의 힘으로 그의 인생을 돌보지 않고 구출 작업에 뛰어든다. 살인 폭력의 거대 조직을 상대하는 현란한 액션과 그 잔혹함은 군더더기지만, “아저씨”는 불의에 희생되는 이웃들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떤 분노와 선의를 보일 수 있는가를 되묻는다. 우리 사회에 착한 사마리아인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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