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다큐<길>­(31)군산 신시도
로드다큐<길>­(31)군산 신시도
  • 하대성
  • 승인 2010.08.19 1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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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길의 묘미는 어디에 있을까. 바다와 섬, 숲과 마을을 한꺼번에 구경하는 재미가 크다. 심심치 않게 짠내가 코끝에 스친다. 은은한 뱃고동이 배경음으로 깔린다. 깔끄막이 심하다 싶으면 심장의 펀치가 강해진다. 풍광이 반복되는 산길처럼 지겹지 않고 바다만 보이는 해안길 같이 단조로움이 적다. 눈과 코, 귀와 가슴을 휘어잡아 흔드는 게 섬 길이다. 걷는 리듬이 강하고 받는 느낌 또한 깊다. 길쟁이들은 섬 길을 ‘길 중의 길’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중독성이 강한 까닭이다. 방향, 고도,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볼거리가 펼쳐지는 게 섬 길이다.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新侍島). 군산에서 서남쪽으로 37㎞ 떨어져 있다. 119가구에 주민 420여 명 살고 있다. 신시도는 지난 4월 섬에서 졸업했다. 새만금방조제길이 완공돼 신시도 턱밑으로 도로가 뚫렸기 때문. ‘33.9㎞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를 구경하세’ 전국에서 사람들이 외치며 몰린다. 주말이면 신시도로 가는 길은 좀 밀린다. 신시도 섬 길을 걷기 전에 봐야 할 곳, 두 곳이 있다. 신시광장과 신시배수관문을 구경하고 걷는 것이 정석이다. 시간없고 성질 급하고 정석보다 변칙이 좋다면 어찌해야 하나. 원샷으로 즐기는 방법이 있다. 신시주차장 왼쪽 끝 벼랑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오르면 멍석만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이곳이 새만금의 허리토막을 구경할 수 있는 조망점. 새만금 배경사진이 멋지게 나오는 포토존 중의 하나다. 이곳에 섰다면 어디 가서 “새만금을 거즘 다 봤다” 말해도 시비 걸 사람은 없을 게다. 새만금을 한눈에 넣고 가슴에 담았다면 이제부터 걷기는 시작된다. 신시도 섬 길은 숲길, 비탈길,마을길, 포구길,방조제길, 고갯길로 인도한다. 총 7㎞ 거리, 4시간 가량 걸린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패총이 출토된 신시도,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은둔했던 섬이다. 고려 때부터 문창현 심리(深里)로 불렸다. ‘문창’은 최치원 선생을 문창후(文昌侯)에 봉하면서 내린 시호. 심리는 지금도 ‘깊은 금’이라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 서유구(1764-1845)가 편찬한 ‘교인계원필경’서문에 “공의 이름은 치원이다. 자는 해부(海夫)요,호는 고운(孤雲)이니, 호남 옥구사람이다”라고 기술했다. 1927년 이능화가 출간한 ‘조선무속고’에는 “섬의 월영대가 바로 선생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지금도 섬사람들이 선생의 기풍을 사모해 사당을 세우고 섬기며 경배하기를 마치 천신(天神)과 같이 한다”고 했다. 최고운 선생은 이처럼 신시도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지금의 신시도는 일제시대때 신치가 바뀐 지명이다.

새만금방조제를 구경한 언덕에서 산길은 절개면 쪽으로 이어진다. 이곳에 가파른 계단이 설치돼 있다. 급경사면을 통과하면 야트막한 나무들 사이로 고군산군도 일대가 전망되기 시작한다. 월영봉(199m)정상에서 시야가 터진다. 시원함에 가슴도 후련하다. 고군산군도가 눈에 쏙 들어온다. 무녀도와 선유도, 장자도, 관리도가 한눈에 보인다. 월영재까진 급경사. 주민들은 말 안장처럼 생겨 질마재라고도 부른다. 이 고갯마루는 신시도와 새만금방조제 주차장을 잇는 교차점이다. 월영고개를 지나면 월영산(月影山 198m) 정상. 작은 돌탑과 최치원이 이곳에 단을 쌓고 글을 읽었다는 전설을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월영산은 가을 단풍이 하도 아름다워 ‘선유팔경’에 꼽히는 곳이다. 멀리 전망대가 있는 곳이 대각산(大角山 187m). 능선따라 가면 ‘마음 안 하늘향기’라고 쓴 팻말이 반긴다. 여기서부터는 두 갈래 길. 몽돌해수욕장 길과 비석거리로 연결된다. 둥글 납작한 돌들이 100m 남짓한 해변에 깔려 있는 몽돌해수욕장. 가족이 즐기기에 좋은 미니해변이다. 곳곳에 바다에서 떠밀려온 쓰레기도 있다. 한켠엔 화장실도 자리한다. 오른쪽 해변 쪽으로 30여 미터 가면 온통 파래밭이다. 이곳을 지나면 ‘깨진바위’가 나온다. 큰 바윗덩어리를 도끼로 내리 친 것처럼 바위가 깨져 있다. 깨진바위 위엔 위도 전말리에 있는 땅솔(땅딸막한 소나무)처럼, 작은 소나무 너덧 그루가 바위에 뿌리를 박고 수백 년 동안 암액(岩液)을 섭취하며 버텨온 것 같다. 깨진바위를 가까이 가보니 굴이 뚫려 있다. 2미터 높이에 1미터 폭이다. 안에는 마치 누군가 수련한 흔적처럼, 방석 같은 평평한 바위 2개가 깔려있다. 바닥이 민들민들하다. 앉아서 하늘이 보니 수도자가 된 기분이다. 암벽에는 시원한 물기가 흐른다. 최고운 선생도 여름에 월영대에서 책을 읽다 목덜미에 땀이 흐르면 몽돌해수욕장에서 몸을 적시고, 이곳 깨진바윗굴에서 휴식을 취했으리라.

해수욕장길에서 왼쪽은 널따란 습지다. 소 한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푸른 초장, 목장 같다. 눈을 들어 월영대 아래를 보면 저만치에 고운초당(高雲草堂)이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오솔길이 선명하다. 초당 주변에 제법 묶어 보이는 소나무가 운치 있다. 안내판 그림엔 최고운 선생이 바위에 앉아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표정이다. 마을 주민들이 중국대륙과 신라 땅을 주유하다 고군산군도에 은둔하고 신선이 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이곳 옛 집터에 초당을 세웠다고 한다. 초당 내부 중앙엔 붉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복(福)자를 새긴 목각이 붙여있다. 최선생께서 여기 오는 모두 사람들에게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마루 앉아서 보면 뒤쪽은 월영대요, 앞쪽은 대각선 전망대가, 오른쪽은 해변이, 왼쪽은 방조제를 막아 만든 농경지다. 이리저리 봐도 풍광이 좋은 터다. 초당 주변 쓰레기와 현수막 그리고 지붕의 짚이 낡아 반쯤 벗겨져 함석이 드러난 것은 꼴불견이다.

대각산전망대에 오르는 길에 붉은 산게 앞장서듯 가로 지른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소나무 뒤로 숨는다. 섬주민들은 산게가 냄새가 심해 먹질 않는다. 동남아에서는 기름에 튀겨서 판다고 한다. 밤이면 길마다 산게가 그물 그물 하다. 대각산 길이 서서히 가팔라지고 조망권이 좋아진다. 오른쪽은 김양식장이요, 왼쪽은 마을이며 포구가 올망졸망하게 햇빛에 반짝인다. 중턱쯤 가면 암릉, 제법 날카로운 바위길이다. 기둥과 밧줄이 설치돼 있어 큰 위험은 없지만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부턴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은 전혀 없다. 눈이 작아 섬 구경을 제대로 못할 지경이다. 섬 조망이 압도적이다. 대각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는 원통형으로 3층 철골구조. 각 층에는 전망 공간이 마련돼 있고 꼭대기 층에는 망원경 2대가 있다. 주변 섬을 두루두루 볼 수 있다. 잔잔한 바다에 바람이 일렁이자 김발이 마치 빗자루 되어 바다를 쓰는 듯하다.

하산길은 편하다. 마을길로 통하는 삼거리까지 30분 정도 걸린다. 중간 쉼터에서 등산객 10여 명이 간식을 먹고 있다. 눈인사하며 차림새를 보니 전문 산꾼 같다. 어느 하나 복장을 허투루 챙긴 사람이 없었다. 내려오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섬과 마을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신시 삼거리에서 만난 정보화마을 위원장 이해성(65)씨. 그는 “전북 섬지역 정보화마을 1호가 신시도다. 신시도 주민들은 인심이 좋고 단결력이 남달라 마을 일이 잘된다. 앞으로 신시도는 정말로 새로운 도시가 될 것이다.”고 동네자랑을 한다. 이 위원장 말씀대로 올 연말이면 새만금방조제와 고군산군도의 섬을 하나로 묶는 연륙교 공사가 시작된다. 신시도에서 무녀도-선유도-장자도 등 4개 섬을 연결하는 총 8.76㎞의 다리가 2013년이면 완성된다. 왕복 2차로에 보도와 자전거 길이 함께 만들어진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새만금방조제에서 맨 끝 장자도까지 자동차로 15분 거리가 된다. 이 15분 거리는 현재 신치항에서 배타고 장자도로 직항하는 시간과 같다. 또 군산여객선터미널항까지 여객선으로 1시간 20∼30분 걸리던 거리도 승용차로 달리면 40분대에 도착이 가능하다. 시간이 반으로 준다. 이에 따른 관광객이 늘면 숙박업소와 식당 등 주민들의 지갑 또한 두둑해 질 것이다. 새로운 관광지가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지풍금 포구. 어선들이 한가롭게 정박해 있다. 몇몇 어부들이 그물을 정리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민박,패션 간판이 눈에 많이 띤다. 신시도는 원래 5개 마을로 구성돼 있었다. 지풍금,안골,은골,신치,염전마을이다. 1970년대 십이동파도 간첩침투사건이후 흩어져 있는 마을을 한데 모으는 작업이 이뤄져 지금은 지풍금 마을로 4개 마을이 이주하게 된 것이다. 포구에서 만난 박태일(65)씨는 신시도 개발위원장이다. “신치에 있었던 쑥떡바위를 보존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말탄 장군바위,멍석바위,돼지바위 등 만물상이 해변에 널려 있었다. 신치저수지 매립공사를 하면서 다 이곳에 묻혔다.” 그는 소중한 관광자원을 잃었다며 씁쓸해 했다. 박병근(50)씨는 민박,음식,유람선업을 함께하고 있다. 그는 14년 전 필리핀 여성과 결혼해 두 딸을 두고 있다. “지난 96년 교회봉사차 필리핀에 갔었다. 그 마을 시의원 집안의 일곱째 딸 아르세니아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 후 열정적인 구애로 신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르세니아를 신시도로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다.”고 박씨는 말한다. 신시도로 시집 온 아르세니아는 민박, 음식점 등을 하며 네 가족이 알콩달콩 살고 있던 어느 날, 초등학교 학생들의 영어선생님으로 변신하면서 스폿트를 받았다. 이러한 사정들이 MBC <인간극장>에 소개되면서 박씨 부부는 한동안 이곳저곳의 인터뷰와 출연요청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고 한다. “처음 신시도에 왔을 땐 캄캄했다. 말이 통하나 한국문화를 아나,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남편의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아르세니아는 음식점 한쪽 벽에 가득 붙여 놓은 언론 보도물의 사연을 풀었다.

코스는 다시 신시도 주차장으로 향한다. 지풍금 포구를 거쳐 삼거리를 지나면 옛 안골마을 자리다. 이곳은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안양서실과 완고당을 세우고 유학생을 양성한 곳이다. 지난 6월 군산문화원에서 학당터와 유허비를 발견함으로써 이런 사실이 입증됐다. 간재 선생(1841∼1922)은 1905년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죽여야한다고 상소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마침내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에 따라 섬으로 들어갔다. 그 섬이 신시도, 상왕등도,계화도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한 간재 선생은 섬를 옮겨 다니면서 강학을 통해 나라는 망하여도 학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분묘에 숫자를 적은 푯말을 박는다. 연륙교가 통과하는 지역으로 보상절차에 착수했다고 한다. 안골 맞은 편은 안골저수지다. 여기에서 장어를 잡는다며 한 주민이 스티로폼으로 배를 만들어 그물을 치고 있다. 저수지 둑길을 진입하기 전에 왼쪽으로 논길 따라 10여 미터 가면 ‘되내기 샘’이 나온다. ‘돼내기 샘은 하늘연못이다. 하늘의 은하수가 땅으로 흘러 바다가 되고, 별들이 고군산군도로 쏟아져 섬들이 되었다. 그 한가운데 하늘에 내려온 생명의 감로수가 있다. 밀물지면 바닷물에 잠기지만 썰물지면 퍼내고 퍼내도 용솟으니 ‘되내기 샘’이라 한다. 최치원 선생이 마시고 신선이 되어 승천한 샘물이라 또한 불로수(不老水)이다.’ 안내문 설명이다. 샘 주변을 기역자 모양으로 석축하고 잔 자갈을 깔아놓았다. 최고운 선생의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구리 한 마리가 이끼 낀 샘 속에서 수영하면서 길손을 되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농부 2명이 논에 농약 주고 있다. 논길을 가로 지르면 방조제길로 연결된다. 방조제에서 바다 쪽을 보면 백포섬이라 부르는 둥근 섬이 보인다. 왜 백포섬인지, 무슨 전설이 있는지 여기저기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다. 방조제 끝은 오토바이,자전거 보관소. 주민들이 신시도로 일보러 갈 때 월영재를 넘어갈 수 없어 여기에 놓고 간 것이다. 또한, 이곳은 고운초당으로 가는 논길의 연결점이다.

월영재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넓다. 자갈길로 정비가 잘 된 편이다. 문제는 경사가 매우 급하다. 얼굴이 땅바닥에 닿을 듯해 걷기조차 힘들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가파르다. 숨이 가슴이 차고 입이 절로 벌어진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헉헉댄다. 허나 어찌하랴. 신시도와 새만금방조제의 주차장을 잇는 유일한 길인 것을. 주민도 길쟁이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갈 수밖에. 월영재 마루에 힘겹게 올라서면 정자가 반긴다. 앞서 간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있다. 부산에서 왔다는 정무호(56)씨도 쉬고 있다. 그는 산악회 등반대장이다. 정기 산악모임으로 부산에서 새벽에 출발해 신시도에 왔다고 한다. 새만금과 섬과 바다 조명권이 너무 좋았다고 말한다. 쉼터 바로 아래에 간이 슈퍼에도 몇몇 사람들이 간식을 들고 있다. 김명순(64·대전)씨는 얼굴 반쯤 가리는 큰 선글라스를 끼고 두건에 모자 썼다. 목엔 손수건까지 두른 채 쉬고 있다. “지인들과 새만금, 신시도를 구경했다. 날씨도 괜찮아 산행을 잘 마쳤다. 새로운 도시가 들어설 이곳은 정말 나중에 신선이 사는 곳이 될 것 같다” 그녀는 다음에 또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월영재를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따라 가면 주차장이다.

기획특집팀=하대성·조경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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