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다큐<길>­(25)부안 포구길(문포­계화­격포­왕포­곰소)
로드다큐<길>­(25)부안 포구길(문포­계화­격포­왕포­곰소)
  • 하대성
  • 승인 2010.06.24 15: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안 포구길은 동진대교에서 시작된다. 동진대교는 부안의 큰 대문이다. 옛 부안사람들은 동진나루를 건너 전주, 서울 나들이를 했다. 나루 건너 죽산, 내재역을 거쳐 김제,금구,이서를 지나 전주에 갔다. 또한 해창을 지나 만경 사창나루를 건너 임피의 소안역으로 하여 논산을 통해 서울로 갔다. 외지인들이 부안에 올때도 대부분 동진 나룻배를 타고 들어왔다. 동진나루는 부안의 관문이자, 교통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옛날 동진 나루쟁이는 유난히 거칠고 버릇이 없기로 유명했다. "동진강 나루쟁이 보다도 후레자식이다" 또는 "후레스럽기가 동진 나루쟁이 뺨치겠다"는 속담이 전해오고 있을 정도다. 이 나루터에 한 번은 허름하게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선개(선가, 나루삯)도 안내고 배에서 내려 휘적휘적 가버리는 것이다.

화가 잔뜩 난 이 고약한 나루쟁이가 쫒아가서 "여보시오, 당신이 뭔데 선개도 안내고 도망치는 게요?"하고 따지자, "야 이놈아! 나도 멀쩡한 부안 김가다"하면서 두루마기를 제치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호패를 쓱 보이니 나루쟁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는 것이다. 부안 김씨들이 이 지방 호족이고 세도도 커서 함부로 할 수 없고 또 이 나루쟁이가 부안 김씨들한테 혼 줄을 당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후부터 부안지방에는 "나도 멀쩡한 부안 김가다"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야기도 이곳 나루터에서 생겨난 말이라 한다.

동진 나루터의 수입이 꽤 좋아서 그 관할권을 놓고 부안의 원님과 김제의 원님이 송사를 벌렸는데 동진강이 서로 자기네 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라감사는 매우 난감했다. 부안과 김제의 경계를 흘러 서해로 빠지는 이 강을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관할권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는데 부안원님이 말하기를 "내 일찍이 김제에 서진이 있다는 말 못 들었고, 부안에 동진 있다는 말을 익히 들었습니다."하고 말하니 김제 원님이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하며 전라감사도 "그렇다, 이제 생각하니 나도 김제에 서진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없구나"하고 부안 원님에게 승소 판결을 내려주고 그 후로는 동진나루터 관할권 시비가 다시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동진 나룻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이미 동진 나루에 다리가 놓였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부안현의 교량조를 보면 동진교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동진의 위쪽에 있다. 신우 초년(1379)에 왜선 50여 척이, 웅연(지금의 곰소)에 침입하여 전현(지금의 호벌치재)를 넘어서 부령현을 노략질하고 동진교를 헐어서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상원수 나세(羅世)가 변안렬(邊安烈)과 더불어 밤에 다리를 구축하고 군사를 나눠 적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동진나루터도 일찍부터 수난의 역사현장이다. 길이445m,폭이10m, 높이16m의 동진대교가 1978년에 놓여 지기 전까지는 나룻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으나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갯길 사람살린 활인정은 어디 멘고

동진대교에서 하구로 2㎞정도 내려가면 작은 포구, 문포(文浦)다. 포구는 왜소한데 배는 많은 편이다. 뿌연 강물이 거품을 뭍으로 뭍으로 민다. 그물 등 어구들이 배 위에 수북하다. 한쪽에선 잡은 고기를 활어집 트럭으로 옮겨 싣고 있다. 부안읍내에 산다는 50대 부부가 배를 고치고 있다. “배를 부리려면 만물상에 만능인이 돼야 한다. 웬만한 고장은 손수 고쳐야 한다. 벌이도 시원찮은 데 고장이 잦아 수리비가 많이 든다.” 부부는 톱으로 자르고 그라인더로 갈아 지지대를 세우고 있다. 현재 배 20여 척만 조업하고 있다. 한때 흥청거리던 위판장은 텅 빈 채 을씨년스럽다.

문포에서 구멍가게 하는 신정례(77)할머니는 주모였다. 62년부터 막걸리를 팔았다. “젖먹이 아이에게 젖줄 틈도 없을 정도로 어부들이 밀려들었다. 장사가 잘돼 7남매 중 4명은 대학과 유학을 보냈고, 3명도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어판장과 실뱀장어 장사도 했다. 그땐 문포에 배 댈 곳이 없을 정도로 포구가 활기찼다.” 신할머니는 젊은 시절 추억을 되새겼다. “좋은 바다 버렸다. 안타깝다. 사람들 다 떠나고 나이들은 노인들이 많다. 예전엔 술이 없어 못 팔았는데, 이제는 사람이 없어 술을 못 판다. 우리 대에서는 새만금 영광 못 볼 것이여…”신 할머니가 깊은 한숨지었다.

조포(鳥浦)는 문포에서 한 달음 4㎞ 거리다. 새포라고 많이 부른다. 포구는 이미 사라졌고 벌엔 붉은 염생식물만 무성하다. 해양경비초소 위에 지은 원두막에서 환경감시원 2명이 자리 잡고 있다. 새포에서 계화도까지는 6㎞다. 오른쪽은 푸른 물결바다요, 왼쪽은 황금 물결 보리 바다이다. 벽해가 상전(碧海桑田)된 계화간척지. 섬이었던 계화도가 60년대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됐다. 2006년 새만금 방조제완공으로 해안선은 고군산도까지 뒤로 물러났다. 예전에 계화도와 창북리사이에 활인정(活人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갯길은 무려 6㎞가 되니, 물때를 잘못 가늠해 갯벌 중간에서 밀물을 만나면 꼼짝없이 바다에 수장될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을 대비해 수상가옥처럼 만든 것이 활인정이라고 한다. 간재 제자인 손주선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간재의 제자이며 신석정의 작은 아버지인 신기검이 지었다는 말도 있다. 그 터는 알 수 없다고 하나 지금 있는 외딴집 근처가 아닌가 싶다. 여러 사료를 좀더 조사하여 활인정을 재건하면 새로운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다.

기우는 저 해를 어여쁘게 그릴 것을

해는 기울고요--/울던 물새는 잠자고 있습니다./탁탁 툭툭 흰 언덕에 가벼이/부딪히는/푸른 물결도 잔잔합니다.//해는 기울고요/끝없는 바닷가에/해는 기울어집니다./오! 내가 美術家(미술가)였다면/기우는 저 해를 어여쁘게 그릴 것을.//해는 기울고요--/밝힌 북새만을 남기고 갑니다./다정한 친구끼리/이별하듯/말없이 시름없이/가버립니다. 열여덟 신석정 시인이 어느 날, 창북리에서 갯길을 걸어 계화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때 수평선을 넘어지는 해를 보고 <기우는 해>, 이 시를 지었다. 아름다운 계화도 낙조가 선하게 그려진다. 방조제길은 계화포구로 통한다. 포구에는 크고 작은 배 100여 척이 빽빽이 발을 묻고 쉬고 있다. 상처 난 배를 수리하는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포구 안쪽은 양지마을이다. 간재선생 사당과 유물관이 있다.

양지마을에서 점방을 운영하는 김광천(72)는 마을역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다. 계화 봉수대와 간재 전우선생의 스토리를 들려줬다. 계화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 복원할 당시 김씨는 마을이장이었다고 한다. “봉수대를 복원할 당시, 그 주변에 주먹만한 돌멩이 흩어져 있었고, 잡목으로 우거져 공사가 쉽지 않았었다. 전남 토말,천안 봉수대 등을 벤치마킹해 도면을 만들고, 산기슭에 있는 돌을 이용해 봉수대를 쌓았다. 석공(면석 전문) 2-3명 동원됐다.” 그는 마을에서 봉수대까지 거리가 970미터이고, 돌계단이 847개라며 정확한 수치까지 밝혔다. 간재선생에 대한 일화도 한토막 전해줬다. “간재가 82세로 운명했을 때 그의 제자 3천여 명과 조문객들이 구름처럼 계화도로 모여들었다. 장례는 익산 삼기에 안장 되였는데, 이 장례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의 구경꾼이 연도를 메웠다고 한다.” 그는 최근 대전에 사는 담양전씨 문중 사람이 보관중인 ‘간재 문집’을 문중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고 전해주기도 했다. 양지에서 계화도 제2호 방조제가 시작되는 돈지까지는 대략 5.5㎞된다. 제방 안쪽으로는 조류지다. 철새들의 낙원으로 민물낚시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새만금 사업이 완공되면 돈지 포구도 육지가 될 것이다.

잔잔한 물결, 사람도 배도 쉼이다

국도 30호선을 따라 변산해수욕장 쪽으로 가다 백련초등학교 앞 오르막길 정상(잿등)에 올라서면 눈앞에 바다가 열린다. 바람모퉁이에서 해안선을 따라 비득마을을 지나면 오른쪽 바닷가에 해창쉼터가 있다. 해창(海倉)은 마을 어귀에 큰 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 새만금 전시관에 지나 합구마을을 돌아 대항마을까지는 2.4㎞. 변산해수욕장 서쪽 끝에는 송포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생선회의 진맛을 볼 수 있다. 고기잡이를 마친 선외기 8대가 정박해 있다. 순창출신으로 군산에서 연탄일을 하다 30년 전에 송포로 이사 왔다는 양홍기(74)씨. 양씨는 15년간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지금은 기력도 떨어지고 몸이 성치못한(장애 4급) 기초생활수급대상자이다. 그는 “배타면서 술을 많이 마셔 폐와 위병으로 매주 병원을 찾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떠나 마을이 옛날같이 활기가 없다.”고 한다.

여기서 4㎞정도 가면 고사포다. 해당화 군락지에는 아직도 해당화 꽃이 피어있다. 해변을 따라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솔향이 풍긴다. 가슴 깊이 들이마시니 상쾌해 진다. 고사포해수욕장 모래사장 끝자락에 성천이란 마을이 있다. 굽이진 해안도로 위에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다. 물도 잔잔하다. 배도 차도 사람도 쉼이다. 고샅에는 개들이 으스렁거린다.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 하섬을 지나면 격포다. 변산반도 끝자락에 자리 잡은 격포항. 항구 왼쪽에 봉화봉과 오른쪽엔 닭이봉 사이에서 안온하다. 옛날에는 수군의 근거지로 수군 진영으로 두어 첨사(僉使 종3품직) 등을 두어 왔다.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 관할의 격포진영이 있었던 곳이다. 수만 권의 책을 쌓은 듯 해식단애가 만들어낸 절경, 채석강과 적벽강을 지나면 궁항,두포에 이른다.

‘너,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 거야/비로소 여행이란./인생의 쓴맛 본 자들의 떠나는 것이니까/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보는 거야/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구불구불하지’ 안도현의 <모항으로 가는 길>중에서. 안 시인 말대로 모항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다. 인생길을 닮았다. 50대에 뒤돌아 본 자화상 같다. 바르게, 똑바로 산다고 살았는데 다시 보니 구불구불한 것처럼.

곰소젓갈은 냄새로 사는 것여…

갑을치를 넘고 마동,작당마을을 거쳐 왕포마을까지는 12㎞. 왕포는 전형적인 어촌마을로 주민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포구가 깨끗하고 평온하다. 바닷가로 향해 지은 모정이 아름답고 방파제도 정리가 잘 돼 있다. 마을 초입에선 어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물을 정리하고 있다. “꽃게가 지금 알을 품고 있어 금어기다. 위도 근해에서 많이 잡는데, 그물은 손이 많이 간다.” 선외기 2척을 가지고 왕포에 사는 이종철(56)씨가 마당에서 부인,장모와 함께 꽃게잡이용 그물을 정리하고 있다. 변산출신 이씨는 왕포에서 30년간 조업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자젓 아세요?”대뜸 묻는다. “들어본 적은 있으나…”라고 답하자 그는 자젓에 대해 설명했다. “작은 새우젓을 자젓이라한다. 6월이면 이곳 갯벌에서 잡는다. 이때 잡아야 살이 통통하다. 조업장면이 TV에 나간 후 우리집이 자젓으로 유명해졌다. 해마다 이맘때쯤 주문전화가 전국에서 온다.1㎏에 1만원에 판다.”

곰소는 1938년까지만 해도 섬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농산물과 군수 물자를 반출하면서 군항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방조제를 쌓아 만든 인공항구다. 그때 현 진서면 연동--범섬--나룻섬--작도마을을 연결하는 방파제를 축조 도로를 개설하고 육지와 연결시킨 것이다. 30년대까지 줄포항을 수탈기지로 상용하다가 토사가 쌓이면서 항구 기능을 상실하자 곰소로 옮긴 것이다. 원래 곰소라는 곳은 웅연도(熊淵島)라 하였다. 이는 옛날 이곳 앞바다에 바다곰들이 서식하면서 새끼 곰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매년 먼 바다로 떠나간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웅연 또는 웅소(熊沼)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곰소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젓갈 생산지다. 90년대부터 목포,강화와 더불어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위도와 영광 앞 바다사이, 우리나라 3대 어장의 하나인 칠산어장에서 잡아 올린 새우,멸치,밴댕이,까나리 등과 곰소 천일염 그리고 발효 기술이 어우러져 맛이 깊고 깔끔하다.그래서 그럴까. 곰소젓갈센터에는 그 유명세 만큼이나 이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을 때운 관광버스가 만원을 이룬다.

“젓갈은 냄새로 사야지,맛으로 사면 안 된다.”곰소젓갈센터에서 젓갈을 파는 임은영(58)씨의 말이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천층,만층,구만층이다. 다 입맛을 맞출 수 없다. 맛내기(양념치기)한 젓갈을 맛보며 맛있으나 마중에는 맛이 없다. 새우젓은 소금(곰소염전)과 새우만으로 담아 삭으면 맛이 일품이다.”“무조건 싸다고 좋은 건 아니다. 단골이 많아 서울,부산,창원 등지 음식점에서 택배로 주문한다.” 임씨는 젓갈 냄새를 맡아보면 맛을 안다고 한다. 곰소젓갈은 연간 약 5천여 톤이 생산되고 있으며 젓갈 종류만도 40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곰소염전은 변산이 염전을 둘러싸고 있다. 변산의 많은 소나무의 꽃가루가 염전에 날려와 소금의 질이 우수하다고 한다. 이 소금을 송홧가루 소금이라 부르며 값도 비싸지만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줄포 포구흔적은 판잣집 어판장뿐

곰소에서 10여㎞가면 줄포다. 줄포라는 명칭은 주을(主乙)에서 유래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이곳에 주을천(主乙川)이 흐르고 그 주변에 안흥창(安興倉)이 있다한다. 지금 줄포에 줄래리(茁萊里)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후 옛 방언명으로 된 지명을 중국식 한문 두 자씩으로 개칭하면서 주래포를 뜻이 같은 래자를 빼고 항구를 강조하기 위하여 줄포라 한 것이다.

줄포삼거리 주유소에서 만난 김해겸(54)씨는 농부지만 지역향토사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줄포의 어원은 주을내(主乙川)에서 나왔다. 이 주을내의 이름이 줄내, 줄포로 된 것이다. 혹자는 줄(茁)이라는 갈대가 무성하여 줄포라고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한때 제물포,군산,줄포,목포는 서해안 4대 포구였다. 줄포는 예전에 황포돛배가 즐비했을 정도로 번성했었다. 50년부터 토사로 인한 바다의 매몰로 선박의 통행이 용이하지 못하자 58년에 어업조합과 부두 노조가 곰소로 이전, 폐항된 것이다. 보시다시피 옛 선착장 자리엔 갈대만 무성하다.” 김씨는 “포구 흔적이라고는 당시 어판장 건물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며 그곳으로 안내했다. 옛 어판장 건물은 2동으로 이뤄졌다. 한 동은 어판장이고,또 한 동은 숙소다. 숙소는 반쯤 헐물어져 있고 어판장 건물은 창고로 쓰이고 있단다. 열쇠로 문이 채워져 있어 내부는 보질 못했으나 부안군에서는 근대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부안생태공원 옆에는 대규모 바둑공원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곳에는 현대 바둑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조남철 선생 생가 복원, 바둑 박물관, 바둑 연수원 등을 연차적으로 건립할 계획이다.

기획특집팀=방선동·하대성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