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노무현 정부시절 노사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소위 ‘네덜란드식 노사관계모델’을 정부에서 제시하자 한나라당 이승철 의원은 ‘외국의 연구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독일과 같은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 이라며 ‘귤나무를 제주도에 심으면 귤이 열리지만 중국 화베이(華北)지방에 심으면 탱자가 열리는 법’ 이라고 지적했다.
2006년 민노당 노회찬의원은 한나라당의 ‘반값 아파트’ 정책을 반박하면서 ‘사람이 살수 없는 공간’을 만들 것이라며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서민을 위한 주택정책이 한나라당을 거치면서 반서민 정책으로 돌변했다’고 주장했다.
정치인들이 흔히 인용 하는 ‘귤과 탱자’의 고사는 남귤북지(江南橘化爲枳)로, 이는 남쪽 땅의 귤나무를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로 변한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 처해 있는 곳에 따라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됨을 이르는 옛 말이다.
이러한 고사는 2,500여년을 두고 아무 고증도 없이 뭇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반문하고 싶다. 귤과 탱자는 같은 운향과(蕓香科)식물이기는 하나 분명 다른 속(屬,genus)이어서, 토양이나 기후에 따라 귤이 탱자가 되거나 탱자가 귤이 되는 경우는 없다. 남쪽에 사는 귤을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되지 않을 뿐더러 온도 때문에 생장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초등학생도 다 아는 상식이다.
다만 몇 천 년 전인 옛날 사람들은 아무리 현명해도 ‘종의기원’을 알지 못하니 귤이 탱자가 되는 논리를 펴도 나무랄 자가 없었을 것이다. 현대인이 만일 영왕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탱자나무는 어딜 가도 탱자 일 뿐이다. 쉬운 말로 ‘재 버릇 개 못 주듯’ 제나라에서 배운 나쁜 짓이 어찌 변하겠느냐‘고..
전남 여수 금오산 향일암에 가면, 후백나무와 동백나무 씨앗이 같은 곳에 한꺼번에 발아하여 소위 사랑나무(連理木)라는 이름으로 성가를 얻자, 어떤 관광 안내자가 그 옆에 서 있는 한 나무를 가리키며, ‘법전 옆에 서있는 저 나무는 느티나무 뿌리에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기적으로 향일암의 유명세라’고 설명하는 걸 보았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아닐 수 없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뭇과에 속하고 동백나무는 차나뭇과에 속하여 근연종(近緣種)이 될 수 없다. 혹간 고목에 먼지가 쌓여 그 속에 다른 나무가 생장하거나, 기생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경우가 전혀 다르다.
몇 년 전 어느 침대광고에 ‘침대는 과학이다’고 선전 하자 광고에 익숙해진 일부 초등학생들이 침대와 과학을 혼돈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근 들어 정치인들은 물론 지식인들 까지도 중국의 고사성어를 한 줄씩 인용하는 것이 유행인 듯하다. 특히 세종시 문제를 놓고 미생의 믿음(尾生之信) 운운하며 논란을 벌이는데 이는 적당한 예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모양세도 좋지 않다. 왜냐하면 이 고사에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해석이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사는 수 천 년 전의 이야기로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논리적으로 옳지 않은 면이 많다. 또 문화도 우리와 다르다. 꼭 인용하려거든 그 적합성이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타당성을 따져 작금의 실정에 맞게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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