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영 시인> 봄날은 갔고…
<박철영 시인> 봄날은 갔고…
  • 김경섭
  • 승인 2010.06.03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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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사방이 환했었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점등한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한낮에도 눈부셨던 때가 엊그제였지요. 바쁜 요즘세상과 닮아 가는지 차례를 기다리지 못한 초경 계집아이처럼 펑 쏟아놓고 부끄러워할지 몰랐던 그런 봄날이 이제 갔습니다.

안개 빗속에 눈보라 군무를 보여주었던 송광사 벚꽃도, 보릿고개시절 눈으로나마 허기를 채워주었던 이팝꽃도 낙화유수지요.

새파란 풀잎과 함께 물위에 떠가던 저 봄날의 꽃들은 정녕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것일까요?

사실 자연은 지독히도 무심하고 매정한 것이죠. 단지 인간이 유정해서 아름다운 것들의 소멸과 추락이 아깝고 안타까워서 그렇게 무심과 유정사이를 배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꽃이 아름다운 건 지기 때문이고, 영웅이 감동을 주는건 마지막순간까지 산다는 것의 뒤를 남기지 않고 살아와서 그렇다고 합니다 뒤를 남기지 않고 피었다 진 꽃들이 그래서 더 숙연합니다.

그래도 영랑이 말했던 것처럼 아직 모란이 피기까지 나의 봄을 기다릴 여유가 있더니 싶더니만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리니 정말 봄을 여윈 슬픔에 잠겨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울고있는 그런 봄날의 모란도 피고 졌네요.

이렇게 봄날 은 갔지만 시절은 아랑 곳 없이 하수상합니다.

쏟아져 나오는 세상 두렵고 힘든 소식에 묻혀, 저 꽃들처럼 예쁘고 피고 진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원래 세상사 그런다 치부하더라도 그래도 문명과 문화를 깨쳤다는 사람들 소식들이 이렇게 어둡기로서야….

중국 당나라 시인 이상은 은 삭막한 풍경 여섯 가지를 꼽았다하지요, 흐르는 맑은 물에 발 씻기. 화사한 꽃 위에 바지 올려놓고 말리기. 가파른 산에 집짓기. 거문고 태워 학 삶아먹기. 꽃 앞에서 차 마시기. 고요한 숲에서 “길비켜”라고 외치기.

아름답고, 격에 맞고, 이치에 바르게 살라는 뜻이겠지만 거문고 태워 학 삶아 먹는건 너무 했죠. 거문고와 학은 문인의 상징이자 문사들의 정신세계를 의탁하는 수단 아닙니까.

현인들의 정신과 지혜가 속절없이 망가지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은 희망이 있어야 하고 배부르고 힘있는 사람들은 나누고 배려하는 소망있는 사회가 갈수록 그리운 것은 거문고를 태워 학을 삶는 현인 지사들의 변절이나 회피 때문은 아닐는지요.

그나마 지치고 팍팍한 일상을 보호해주고 껴안아줘야 할 공직자들마저 고요한 숲에서 “길비켜”라고 큰소리치지 않고 있는지..

제가 몸담고 있는 경찰은 더더욱 화사한 꽃나무에 젖은 바지나 말리지 않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볼입니다.

“봄바람이 온 몸 부풀려 갈 때 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고 오늘같이 젊은날 더 이상 없으리라.....” 계절을 찬미한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 모두 낙화의 아쉬움 잠시 미루고 아직 바람 팽팽한 보리수 밑에서 누군가의 희망이 되는 초저녁 별로 떠있는 꿈을 한번쯤 꾸어 보시면 어떠실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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