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의 30주년을 맞으며
5.18 민주화운동의 30주년을 맞으며
  • 이병렬
  • 승인 2010.05.1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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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꼭 30년전 민주와 자주, 평등의 세상을 위해 무참하고도 장엄하게 산화해간 광주민주항쟁의 그날이다. 지난 30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었는가? 30년이나 지난 사건을 두고도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우리가 어찌 잊혀지게 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본다. 아직도 우리의 뇌속에 기억이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되고, 폭도가 민주화유공자가 되고, 망월동 공동묘지가 국립 5.18묘지가 되고,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이 된 역사이기도 하다.

광주민주항쟁 또는 광주사태라고 불리웠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주의정부수립,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5.17군사정변을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 9일에 걸친 광주민주화운동 결과 2009년도에 광주광역시가 발표한 숫자는 다음과 같다. 사망자가 155명, 행방불명자가 7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2277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있는 희생자 5명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군인 및 경찰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검찰은 19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하였지만, 발포책임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7년 5월 준공된 국립 5.18민주묘지에는 모두 유공자 621명의 묘가 들어서 있다. 이제5.18의 주인공은 광주시민 뿐만아니라 나아가 전국 민주시민이라고 확대 승화시켜야한다. 그리고 ‘민주’ ‘인권’ ‘평화’로 자리매김하는 5.18의 가치는 우리나라의 민주시민 모두가 가져할 덕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30년전 오직 폭력이 난무한 지옥의 장소에서 죽어가고 짓밟히고 형언할 수 없는 고문에 시달린 광주시민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시간의 흐름은 역사적 사건이 가지는 의미와 방향을 더 넓고 깊게만든다. 그러나 그 사건이 가져온 변화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에 깊이 자리잡을수록 ‘그날’이 지니는 현장성과 생생함은 빛이 바래기 십상이다. 광주항쟁 역시 반독재, 민주화를 향한 피끓는 저항의 역사라는 의미에서 점차 제도화된 기념의 대상으로 퇴색해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특히 현 이명박 대통령의 불참이 거듭되고 있는 기념식과 공무원노조공무원과 가족들의 광주순례참가를 압박하고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징계를 운운하고 있다는 행정안전부의 공언은 매우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광주항쟁으로 불리웠던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지평을 연 역사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5.18민주화운동 중의 시민의 높은 정치력과 도덕성, 참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에 구현된 ‘절대공동체’적 경험의 공유는 이땅의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희망을 부여했다.

한세대가 흐른 지금 5월 광주항쟁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기억 그자체가 아니라 항쟁의 정신과 교훈을 우리사회에 내면화하는 점이다. 5.18의 민주적 가치가 일상생활에 스며들고, 자주.통일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되고 이후 한국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된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병렬 우석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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