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다큐<길>­ (19) 아름다운 순례길(사상의 길)
로드다큐<길>­ (19) 아름다운 순례길(사상의 길)
  • 하대성
  • 승인 2010.04.08 1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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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에서도 봄은 꽃을 피우고...
‘주여/저에게/이름을 주옵소서.//당신의 부르심을 입어/저도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주여/저에게/이름을 주옵소서.//당신의 부르심을 입어/저도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주여/주여/주여/태어나기 전의/이 혼돈과 어둠의 세계에서/새로운 탄생의/빛을 보게 하시고/진실로 혼매한 심령에/눈동자를 베풀어 주십시오.//'나'라는 완고한 돌문을/열리게 하옵시고/당신의 음성이/불길이 되어/저를 태워 주십시오.//그리하여/바람과 동굴의/저의 잎에/신앙의 신선한/열매를 물리게 하옵시고/당신의/부르심을 입어/저도/무엇이 되고 싶습니다.//주여/간절한/새벽의 기도를 들으시고/저에게 이름을 주옵소서.’ 그리스찬 시인으로 유명한 박목월의 <부활절 아침의 기도>다.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은 목월. “완고한 나라는 돌문이 열리게 하소서.”라는 고백처럼 그의 신앙은 신실했다. 부활절을 앞둔 지난 2,3일 ‘아름다운 순례길’취재는 금산사에서 율치까지 13㎞에 이르는 ‘종교의 길,사상의 길’위에서 이뤄졌다.





초록을 입고 있는 금산사 가는 길은 온통 꽃 대궐이다. 귀신사 인근에는 복사꽃이 만발이다. 청도리를 지나자 매향이 그득하다. 조금 있으면 벚꽃이 만개할 차례. 김제 금산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실제로 미륵불을 모셨던 장륙전(금당)이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법주사가 목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금산사는 장륙선으로 당시 모습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왕 견훤이 아들 신검에 유배되었던 곳, 금산사. 진표율사의 어릴 적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 정도 들었을 것이다. 어릴 때 개구리를 잡아 나뭇가지에 꿰어서 놀다가 무심코 버려두었는데 봄이 되어서도 죽지 않고 그 자리에서 괴로워하는 개구리를 보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크게 깨우치게 된다. 그 뒤 구도의 길을 나선 진표율사는 미륵불을 찾기 위해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온몸을 돌로 두들기는 고행을 하기도 한다. 견훤의 유배, 진표율사의 고행처인 금산사, 지금은 한산하다. 군데군데 차량과 상춘객들이 눈에 띨 뿐 고즈넉하다. 만인교와 금산교를 건너면 금산교회. 금산교회는 ㄱ자 교회로도 유명하다. 조덕삼과 이자익 이야기로 차고 넘친다. 전주 서문교회에서 선교하던 테이트 선교사가 금산교회를 시작했다. 10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다. 일찍 부모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자익. 그는 금산리 유지로 있던 조덕삼의 집에 들어가 머슴생활을 한다. 조덕삼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자 그도 함께 예수를 믿게 된다. 교회가 자리를 갖추게 되자 장로를 뽑게 됐다. 후보로 오른 사람은 조덕삼과 그의 머슴 이자익. 성도들은 이자익을 선택했다. 조덕삼은 말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자익은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이 참으로 큰일을 해냈습니다.” 머슴이 상전 된 것이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성경말씀대로 됐다. 먼저 된 이자익과 나중 된 조덕삼, 한국 기독교 안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나무 종탑에 달린 부활절 현수막이 봄바람에 살랑인다. 주말이나 방학철이면 순례객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금평삼거리. 제비산(帝妃山)이 반긴다. 근처에 대순진리교,원불교,동곡약방이 자리하고 정여립 활동지역이다. 대문 앞에서 금평저수지를 바라보며 봄볕을 쬐는 이병권(90·동곡마을)씨. 그는 이곳이 탯자리다. 자식들은 도시에서 살고 할머니와 살고 있다. “할아버지, 집이 참 좋네요. 앞에는 호수,옆에 꽃밭,뒤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네요.”“풍광이야, 그만이지. 근데 집터가 우리 땅이 아녀.원불교 땅여.교당을 봐주는 조건으로 쓰고 있어. “무슨 교당 땅이에요.”“이 길로 쭉 가봐 나와, 볼 것이 많아”“같이 가서 볼 수 있어요.”“아니, 난 다리가 부실해. 혼자 가도 괜찮아. 한번 가봐.” 동심원이라는 돌간판을 따라 갔다. 온갖 석물이 즐비하고 매화,복사꽃이 만발했다. 누정에 오르자 방문록과 벼루가 놓여 있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간 흔적이다. 반짝반짝 금평저수지가 시원하게 들어왔다. 물비눌이 눈을 간지렵혔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볼 것이 많았다. 돌장승이 나열해 있고 돌계단이 정겨웠다. 동곡마을에 왔다. 동네가 조용했다. 농사일로 논,밭에 간 모양이다. 동곡이란 지명은 예전에 도예지가 있던 까닭에 그릇골이라 불리던 것이 구릿골로 변했다. 한자로 옮기면서 구리동(銅) 골곡(谷)이라 하여 동곡이 생긴 것이다. 동곡약방은 지금 신축공사중이다. 이곳 금산 주변은 일찍이 삼한시대로부터 벼농사를 지어왔던 곳이다. 기름진 평야와 낮은 언덕이 조화를 이루는 화남곡창의 중심지이다. 백제 때에는 벽골군이었다. 벽골은 볏골에서 변천되었고, 볏골은 벼의 고을이라는 뜻으로 한자음에 따라 벽골이라 한다. 풍부땅 금산, 전에는 사금을 많이 캤다. 지금도 사금은 있으나 캐는 사금보다 들어가는 품삯이 많이 수지가 안 맞아 안 캔다. 저수지 인근 산에는 폐광이 군데군데 웅크리고 있다.

부평마을 금산중·고앞에서 김문석(금산중2·하운마을)군을 만났다. 수업을 마치고 귀갓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금산중·고는 동국대부설학교다.“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예수를 믿고 있다. 동생과 함께 원평교회를 다닌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교시 불교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엔 그냥 있다. 시험도 안보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안 쓴다.”문석이는 불교 학교로 인한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금산중·고 대각선 맞은편은 원불교 원평교당이다. 입구에 ‘우리는 하나’라고 쓴 대형 표지석이 인상적이다. 유치원생들이 놀이에 여념이 없다.“아저씨, 여기에 왜 왔어요.”“구경하려고 왔다.넌”“엄마가요,여기서 일해요, 그래서 왔어요.”초등학교 1학년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자전거 타고 식당쪽으로 향했다. 놀이터에서 그네,자전거 타는 대여섯 명 아이들의 신나는 웃음소리와 봄햇살이 하늘에 울림으로 맴돌았다. 원평교당 맞은편은 부평마을이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사금(砂金)을 캐가고 메워진 자리에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금을 많이 캐내어 부자가 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부평(富坪)이라 설이 있고, 금을 캔 구덩이를 메워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뜰 부(浮)자를 써 부평(浮坪)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부자 부(富)자로 고쳤다고 한다. 이곳에 천주교 원평성당이 있다. 마당에서는 신도 3명이 망가진 성물 보수에 신경을 쓰고 있다. 원평성당에 다닌 지 54년 됐다는 김남기씨(80·성암)는 아들이 신부이다. “이 곳에는 수류성당과 원평성당이 있다. 전국적으로 한 개 면에 두 성당은 금산이 유일할 것이다.” 그는 종교가 많다고 주민 간에 갈등이나 마찰은 없었다고 한다. 신도들이 성당 옆에서 하는 공사로 바쁘게 움직였다. 모태 신앙인 조민경(34·원평성당 사무장)씨는 3개월 전 대전에서 성계로 이사 왔다. 부활절 행사 때 쓸 달걀에 색칠을 하고 있다. “딸아이와 함께 90개 정도 예쁘게 장식했다. 성삼일 동안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조 사무장은 그림솜씨가 남달라 보였다. 달걀마다 다른 그림을 넣었다. 그리기에 달란트를 받은 것 같았다. 성당 뒤편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엔 원평교회다. 원평교회는 작년에 100주년 행사를 거행했다. 도지사,국회의원 등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장성광 목사는 고심했다. 축사를 다 시킬 수도 없고, 누구를 뺄 수 없고…. 장목사는 지역교회이고, 지역주민들이 성도이기에 김제시장과 금산면장만 인사말을 시켰다. 정치적 행사 변질을 우려한 조치였다고 한다. 김제지역에는 공덕 중앙교회,연정교회 등이 1백 년 넘었다고 한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예배당 입구에 걸린 부활절 축하 현수막이 펄렁이고 있다.





원평교를 건너면 원평시장이다. 시장 뒷편에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가 있다. 1919년 3월20일 벌인 원평장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였던 그 현장, 지금은 어린아이 3명이 기념비에 받침 거북돌 등을 타고 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몸통이 뒤틀리고 가지마다 생채기가 난 수백 년 묵은 팽나무가 그때 모습을 증언하듯 길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송우영씨(83·원평마을)씨는 동료 여섯 명과 점토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원평장이 옛날에 대단했나요” “아 그럼, 원평장날은 4,9일인데 예전에 대단했지. 정읍,김제,전주에서까지 장에 왔어. 우시장이 서면 원평천을 따라 소 행렬이 볼만했지. 그래서 독립만세운동도 이곳에 벌인 거 아니겠어.” 그는 원평마을 뒷산에 가면 지금도 동학군 무덤이 즐비하다고 말했다. 구미마을도 조용했다. 원래 마을이름은 구미란(龜尾卵)이다. 마을 앞에 거북이 머리와 같은 바위가 있고, 마을 뒷산 모습이 거북 등을 닮았는데, 이 마을은 거북이 꼬리부분에 있어 ‘구미’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광복군 제1지대장 이종희 장군(1892∼1946)이 태어난 곳이다. 생가와 비석이 있다. 생가는 원래 터가 아닌 마을 초입 한적한 곳에 새워져 있어 생가의 의미가 상실됐다는 말이 많다. 또한, 구미에는 ‘두초당 어필각’이 있었다. 200여 년 전 조선 정조 때 이 마을에 두 씨가 살고 있었다. 두 씨는 명필일 뿐만 아니라 문장 또한 뛰어나 정조임금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정조는 그때마다 쌀,꿩,곶감,병풍 등을 보내 주었으며 ‘초당’이라는 호까지 지어내려 주었다. 이에 감격한 두 씨는 자그마한 집을 짓고 그곳에 임금의 글씨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 집이 ‘두초당 어필각’이라고 한다.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구미마을 김남근(78)씨는 마을 뒷산에 있는 동학군 무덤에서 매년 동짓날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제사 지낸 지가 벌써 18년이 됐다. 일 년에 두 차례 벌초도 한다. 지금도 밭을 일구다 보면, 당시 사용한 실탄이 나온다.” 그는 동학군의 구미란 전투를 설명했다.





‘산은/금(金)을 이루고/금이 산으로 쌓인 고을.//금이 모여 드디어/들을 이룬/엄뫼 아래 금만(金萬) 들판.//두월천(斗月川),원평천(院坪川)/삼천(三川),계월천(桂月川)은/금 반(半) 모래 반 냇갈.//금가루 긁어모은 장평들/대송들,고잔들,독배들/들마다 넘쳐나는 금모래.//천고(千古)의 인내로/이뤄낸 금의 결정(結晶)/알맹이 굵은 징게(金堤)의 씨알처럼.//금 같은 사람들 산을 이루고/귀한 사람 금처럼 쌓인 들녘/금구(金溝)면,금산(金山)면,김제(金堤)시,그리고 금만(金萬)들.’ 최종규 시인의 <엄뫼의 들>이다. 금이 산처럼 쌓인 고을, 금산. 그래서 사람들이 모였을까. 그 영향으로 종교 본산지가 됐을까. 냇가에는 모래 반,금 반이란다. 금모래다. 들으면 들을수록, 부르면 부를수록 기분 좋은 지명이다. 사단법인 김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최고원 (42·구미마을)씨. “구미란 전투에 대한 문헌을 보면 동학군들의 전사장면을 삼대가 쓰러지듯 했다.온 산이 허했다.”며 최 상임이사는 말했다. “우금치전투에 패한 동학군이 원평에 재집결하여 구미란전투를 치른 것이다. 수백 명의 동학군이 죽었다. 어유동에는 총탄을 제조한 흔적이 남아있다. 가마터 인근에는 쇠똥이 널려 있다. 집강소로 쓰인 집도 남아있다.” 최 상임이사는 “구미란 전투에 대한 학술적 정립이 된 만큼 발굴조사 전이라도 묘역정비작업을 서둘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스는 원평천을 따라 난 수류길을 안내했다. 옛날 옹기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는 시목(枾木)마을을 거쳐 용복마을에 이르렀다. 용복(龍伏)은 금성리 가운데 있는 마을로, 뒷산 모양이 마치 큰 용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1800여평 양파밭에서 거름을 주는 신해춘(61·용복마을)씨. 그는 3년째 양파를 재배하고 있다. “수익도 괜찮고 수확후에는 콩이나 배추를 심을까 한다. 인건비가 비싸 일꾼얻기가 어렵다.” 신씨는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 들였다. “옛날 700여명이 마을에서 살았다. 지금은 50여명 안팎이다. 밭에 돌탑이 있었다. 뱀날이라 부른다. 뱀이 개구리를 차 먹는 지세이다.” 그는 91년 서울에서 귀향해 지금껏 농사짓고 있으며 마을 유래도 잘 알고 있었다.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며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사물도 하나의 길이다<중략>지혜로운 자는 마음 안에 있고/어리석은 자의 길은 마음 밖에 있다//아무리 길이 길어도 종착지는 하나다’ 이외수 시인의 <길에 관한 명상수첩>이다. 이 시인은 길을 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물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기쁨은 어디에 있을까. 어떤 이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즐겁다고 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살면 피곤하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됨엔 평안과 쉼이 있다. 수류성당 넉넉한 예수상이 길손을 맞이한다. 벚꽃이 흐드러졌다. 100년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고목이 성당과 어울려 운치 있는 풍경을 자아낸다. 수류본당은 1895년 9월까지 모악산 골짜기 배재마을(현 완주 구이 안덕리)에 자리 잡았다가 그해 10월 이곳 평야지대로 나왔다. 1907년에 48칸의 목조성당을 완공했으나 1950년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불을 질러 전소됐다. 이때 신자 50여 명이 순교했다. 현재 성당은 본당 신자들이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채취하여 벽돌을 만들어 1959년에 지어졌다. 전라도 남부 전역을 관할하던 초기 천주교회의 하나로, 동양에서 가장 많은 신부와 수녀가 배출된 성당으로 유명하다. 2003년 이민용 감독의 ‘보리울의 여름’이 올로케로 이 일대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길은 화율리로 이어진다. 상화와 율치 두 마을이 있다. 율치(栗峙)는 밤티라고도 부른다. 완주 구이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못미처 있다. 주위에 밤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23살 때 이장을 했다는 이철상(61·율치마을)씨. “예전에 보부상들이 이 길로 엄청나게 다녔다. 숯,옥수수 등을 메고 줄지어 밤재 넘나들었다. 아가씨들도 맘 놓고 다녔다. 그만큼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 그는 1940년대를 회상했다. 봄에 걷는 ‘사상의 길’에는 향기가 있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가득했다. 그리고 생명이 있었다. 땅에는 꿈틀대는 초록 생명이 있듯, 하늘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것은 메마른 삶에 촉촉히 내리는 봄비같은 생수이다.

기획특집팀=하대성·조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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