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1대 왕으로 추대된 중종이 모든 신하와 백성의 하례를 받을 때 단경왕후도 왕비의 자리에 앉아 하례를 받았다. 그러나 신수근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한 박원종 등은 단경왕후가 왕비로 있으면 자신들의 뒷날이 불안함을 느껴 왕비를 폐출하도록 중종을 압박하였다. 그 때 중종은 조강지처(糟糠之妻) 임을 생각하여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같은 달 9일에 왕비를 사저로 내 보냈다. 그 후 정현왕후는 후궁을 들여 행실을 관찰하다가 장경왕후(章敬王后)를 왕비로 간택을 하였다. 중종 10년(1515) 장경왕후가 인종(仁宗)을 낳고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승하하여 중전(中殿)의 자리가 비게 되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이 “중종반정 당시에 후환이 두려운 박원종 일파가 죄 없는 왕비를 폐출하도록 하였으니 그 들의 관작을 추탈하여 큰 분수를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중전의 자리에 단경왕후를 다시 앉혀야 한다.”는 상언을 하였다. 이 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단경왕후는 사저에서 명종 12년(1557) 12월 7일에 승하하였다. 폐출 당한 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장례의 절차를 후하게 갖추지 아니 하여 많은 사람들이 슬퍼한 가운데 친정 조카인 신사원(愼思遠)이 상주(喪主)가 되어 장사를 지냈다. 장지는 신수근의 무덤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양주군 장흥면 수회동(水回洞) 남동향(亥坐巳向) 언덕이다. 현종(顯宗)과 숙종(肅宗) 때에 복위문제가 거론 되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영조 15년(1739) 5월에 시호를 단경왕후라 올리고, 신주를 고쳐 모시고,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올려 비로소 복위되었다.
온릉은 한북정맥 한강봉에서 분기된 산줄기가 챌봉을 지나 일영봉을 만든 다음 작은 봉우리를 일으켜 세워 온릉으로 맥(脈)을 연결해 주었다. 홍살문에서 능(陵)을 바라보면 더없이 아름답고 편안해 보이고, 청룡은 앞산까지 연결되어 능을 잘 감싸주고 있다. 살아서 남편으로부터 보호를 받아보지 못한 한을 죽어서야 이룬 분위기다. 그러나 앞산 뒤에서는 흉한 산 3개가 넘겨다보고 있는데 풍수에서는 이러한 산을 도적봉(窺峰)이라 한다. 오싹한 느낌이 드는 이 봉우리들이 마치 자신을 궁궐에서 내치도록 압박을 하였던 중종반정의 주동자들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를 잘 막아주는 듬직한 신하(朱雀)가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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