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흐곡선
코흐곡선
  • 한성천
  • 승인 2010.01.2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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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흐라는 스웨덴의 수학자는 각 변을 3등분하여 그 가운데 부분을 밑변으로 하는 정 삼각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삼각형의 밑변인 처음 선분의 가운데 부분을 없애고 두 변을 남긴다. 그러면, 길이가 같은 네 개의 선분으로 된 꺾은 선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계속 되풀이한 상태를 코흐곡선이라고 한다. n번 되풀이한 이 도형은 n배로 확대하면 처음의 코흐곡선과 일치하는 똑같은 도형들이 나타난다. 즉, 코흐곡선은 부분과 전체가 닮음인 도형인 것이다.

코흐 곡선 같은 것이 프랙털 도형의 사례이다. 정의로부터 짐작하건대 위의 도형은 아무리 확대해도 계속해서 들쭉날쭉하므로 1차원의 곡선은 아니고 자를 이용하여 도저히 그 길이를 측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2차원일까? 그러나 위 곡선은 평면은 아니므로 2차원보다는 낮은 차원이다.

그래서 만델브로는 1차원과 2차원의 중간 차원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것이 소위 ‘프랙털 차원’ 또는 하우스도르프차원이라고 한다. 선분은 1차원의 도형이고, 정사각형은 2차원의 도형이고, 정육면체는 3차원의 도형이라는 것은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선분을 반으로 나누면 선분의 개수는 2개가 된다.

정사각형을 가로, 세로로 2등분 하면 정사각형은 4개가 된다. 정육면체를 가로, 세로, 높이로 2등분 하면 8개가 된다. 선분을 3등분 하면 선분의 개수는 3개가 된다. 정사각형을 가로, 세로로 3등분 하면 정사각형은 9개가 된다. 정육면체를 가로, 세로, 높이로 3등분 하면 27개가 된다.

이제 일반적으로 n차원 물체를 n등분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자. 먼저 길이가 1인 선분을 n등분하면 나누어진 구간 하나의 길이는 ε=1/n이고, 선분의 개수는 N=n=1/ε 이다. 알고 보면, 이 도형은 지극히 단순한 규칙으로 이루어진 도형이지만 코흐곡선은 삼각형이나 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정보가 숨어 있다. 그래서 자주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도형이 된다.

무엇인가를 보고 재미를 느끼는 것은 그 만큼 그 대상에서 얻는 정보량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 그것이 재미있을수록 그 책으로부터 풍부한 정보를 얻는다. 특히 자기에게 꼭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은 정보가 적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이고 사실은 복잡함, 정보량, 모른다, 중의 어느 것 하나가 커지면 나머지도 커지고, 어느 것 하나가 작아지면 다른 것도 작아지는 것이다.

상식의 붕괴는 인간생활에 큰 혼란을 초래한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했을 때는 우리 앞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며, 특히 학문 세계에서는 풍요로운 창조가 가능해진다. 원시인의 세계에서는 이름이 없는 것이 많지만, 문명의 세계로 갈수록 이름도 다양해진다. 실제로 이름이란 관심 있는 대상에 붙여지기 마련이다.

수학도 발전할 때마다 새로운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른바, 프랙털 기학학도 예외는 아니다. 이 새로운 기하학은 평소에 수학자의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차원의 개념이 붕괴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지난 1월 8일 수학이야기에서 이 부분을 거론한바 있다.)우리들은 초등학교 이래 1차원, 2차원, 등의 정수차원에 익숙해 왔다. 그런데 코흐공간과 같은 프랙털 기하에서는 4/3차원과 같은 분수차원이 등장한다.

이런 분수나 소수로 된 차원은 공간적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커다란 거부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긴 치마를 감은 몸을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만 여기고 있을 때 난데없이 미니스커트가 등장한 것과 같은 큰 충격과 혼란이 몰려온다. 요즘은 배꼽티가 나와서 우리들의 고정관념이 흔들리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고 보니 수학자는 계속 상식의 옷을 벗는 스트리커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연은 복잡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불규칙한 산등성이나 뭉게구름이나 들쭉날쭉한 나무들, 그리고 훨훨 타는 불꽃들은 직선과 원만을 고집하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래서 수학자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것들을 기하학의 대상으로 삼을 생각은 아예 먹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이런 것들에 대한 수학적인 명칭도 없었다.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에서 “새는 알을 깨는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고 했듯 우리도 낡은 고정관념을 깨는 아픔을 견디면서 상식을 벗어 던지는 용기만 있다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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