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말려야 한다
싸움은 말려야 한다
  • 이한교
  • 승인 2010.01.26 18: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해가 되면 무엇인가 새로워질 것 같고, 어둠이 가시고 새로운 빛이 해처럼 솟아오를 같다. 불가능은 뒤로 가고, 갈등과 대립이 용서로 가려지고, 서로 위하고 격려하며 아름다운 세상이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대는 잠시일 뿐, 오늘도 어제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왕이다.’라 했다. 즉 싸움이란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보편적이고 변함없는 법칙이지만,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싸움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소모적인 싸움은 피하고 싶지만, 이 시각도 오만과 편견으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삐걱대며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싸움이란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서 시작된다. 때로 가혹한 희생을 요구하고, 비참하게 만들기도 하는 이 싸움을 멈추기 위해 사람은 약속을 했다. 이를 법(약속)이라 한다. 우리는 이 법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보호받고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기 원하지만, 이를 무시하며 살려는 사람 탓에 세상이 시끄럽다. 법은 힘없이 무너지고, 지키면 손해 본다는 생각, 법은 고무줄과 같은 것이라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싸움의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싸움이 계속되는 세상은 전쟁터이다. 여야(與野) 할 것 없이 치고 박고 난리다. 이 싸움은 반 강재로라도 말려야 되는 것이다. 이해 시켜야하고, 때로 정확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비록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해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반드시 바로 잡아가는 것이 공직자의 바른 자세라고 본다. 그것이 아주 약한 민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지금 이 시각도 싸움을 수수방관하는 행정 당국을 보고 있다. 작은 시골 마을이어서 일까. 극히 상식선에서 한번 고민하고 뭐가 문제인지 물어 보기만 해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주민의 자정 능력을 핑계 삼아 두고 보자는 식의 행정에 대하여 지적을 하고 싶다.

확실한 답이 있는데도 눈치만 보고는 이유에 대하여, 일부 주민들은 6?2선거를 앞두고 표 계산을 하기 때문이라 하고, 또는 힘 있는 특정인이 설쳐대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고 있는데도 말이 없다. 전 주민의 약 32%가 위장전입자로 이뤄진 이 마을을 두고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바로 이것이 공직자의 전형적인 복지부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장을 직접 나서서 확인해야 됨에도 아직도 책상에 앉아있다. 이처럼 무사 안일한 공직자를 보는 것은 씁쓸하고 슬픈 일이다. 아마 약한 주민의 민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혼적인 태도를 보자니 화가 난다. 공직자란 유연한 사고와 열린 자세로 민원인의 기본입장을 듣고 그들을 설득해 타협점을 찾도록 하는 것이 기본자세라고 본다.

이제라도 일어날 때라고 본다. 언제까지 땅에 엎드려 장애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나서서 해결하라는 임무를 받음에도 아직도 몸을 사려 숨어 있을 텐가. 뚜렷이 보이는 화를 키워 스스로 자멸하도록 방관하는 당신들을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불씨를 초기에 진압해야 된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데, 산 전체를 다 태우고 난 다음에 소화기를 사용하려 아껴두고 있는가.

공직자는 법을 만들었고, 그 법을 지키고 집행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4대강, 세종시 등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작은 마을의 주민으로 보면 이장선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서민은 이웃과 무모한 싸움으로 상처받기를 원치 않는다. 눈치 보지 말고 소신대로 규정(법)대로 지금당장 복지부동의 자세를 버리고 주민의 편에서 갈등의 가르마를 타야할 것이다. 군수가 나서서 싸움을 말려야 된다는 얘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