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타인의 고통
  • 황선철
  • 승인 2010.01.03 14: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1860년대 초 자신의 일기에 “매일, 매달, 혹은 매년 신문지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가장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소식이 실리지 않을 때가 없다. <.....> 처음 줄부터 끝줄까지 모든 신문들은 공포에 질릴 만한 소식투성이이다. 군주들, 국가들, 개인들이 저지른 온갖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온 세상에 판치는 잔악 행위 등등 문명화된 인간은 매일 이 메스꺼운 전채로 아침식사의 식욕을 돋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전 세계의 잔인하고 부당한 소식들이 실린 조간 신문을 든 채 식탁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부르주아지를 힐난하는 글이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묘사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서 매일, 매시간 조간 신문이나 텔레비전, 컴퓨터 등을 통해서 받아보는 끔찍하고 부조리한 소식들이 우리 무감각하게 만든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용산참사가 발생한 후 345일 만에 협상이 타결되었다. 재개발 사업을 위한 철거 과정에서 세입자들이 영업권과 주거권,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발생한 비극적인 참사였다.

협상 타결은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유가족, 이에 분노하면서 함께 행동했던 자발적인 시민들, 종교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는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무관심이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내놓은 ‘세대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보고서에서 성장둔화와 고용 없는 성장의 영향으로 일자리 수 증가가 부족하며, 사교육 확대로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커져 고소득층 자녀의 명문대학 진학 비중이 높아지고, 부동산 등 가격의 급등으로 재산의 증여·상속이 활발해 진다는 것을 근거로 세대간 계층 이동성이 낮아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제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교육을 통한 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가져오기 어렵게 되었다. 앞으로 공교육의 내실화, 경제성장과 새로운 고용 증진이 활성화 되지 않는 한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세상”은 보기 어렵게 되었다. ‘부의 대물림’이 심화될 전망이다.

전통사회에서 내가 태어 날 때 어느 신분으로 태어났느냐가 그의 평생 지위를 정하였듯이 오늘날 부모의 경제적 능력은 하나의 신분이 되어 가고 있다. 사다리에서 어느 단을 차지하고 있느냐는 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부의 형성이 관치금융, 정경유착, 고급정보 등과 같은 부조리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루어 졌다. 가난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한 요인도 부인할 수 없다.

기득권 세력은 사회적 약자가 경제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관심과 아낌 없는 배려를 해야 한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길이다.

세계적 투자가 워런 버핏은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전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도 기부자 순위에서 결코 뒤지지 않고 있다. 세계 최고의 부자들의 기부문화에 긍정적 인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자선 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더 이상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복지, 재분배 정책 등에 대하여 비관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평등·정의·박애를 그 가치로 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간에 대화와 타협, 상호 존중, 소수자 존중, 양보를 전제로 실현된다. 따라서 무민(無民), 무법(無法), 무능(無能), 무권(無權), 무체(無體)에 빠진 국회에 분노와 연민을 느끼는 이유이다.

종교 지도자들의 신년 메시지는 사랑, 조화, 상생, 절제, 배려 등으로 압축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