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삶, 그 씁쓸함에 대하여
아버지의 삶, 그 씁쓸함에 대하여
  • 김흥주
  • 승인 2009.12.14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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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모자가정이라 하면 자세히 따져보지도 않은 채 결손가정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결손’이라는 의미는 ‘아버지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가정 내의 아버지 존재가 정상가족 여부를 가름한다는 의미다. 이때 아버지 존재는 다름 아닌 ‘생계부양자’ 역할수행이다. 아버지가 있어야 가족의 생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성역할 분리 신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인식 상 오류가 있다. 첫째, 가정 내의 남성은 아버지 역할만이 니라 남편역할(부부관계), 아들역할(부자관계)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생계부양자로서 아버지 역할만을 강조하기에 남편역할, 아들역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부부갈등, 고부갈등이 일어난다. 둘째, 아버지 ‘존재’와 아버지 ‘역할’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존재여부’만을 두고 정상성(normality)을 판가름한다. 이러한 착시 속에서 흔히 가정의 여성노동이 폄하되고 있다. 진정한 남성의 역할, 아버지다움(fatherhood)이 무엇인지 혼란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가? 이것이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과거에는 오로지 생계부양자로서 역할만 수행하면 모든 것이 면제될 수 있었다. 설령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버지ㆍ남편의 권위는 도전받지 않았다. 가부장적 가족질서가 그 만큼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회 환경의 변화는 이러한 역할체계에 균열을 가져오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여성의 변화다. 여성의 취업률 증가와 경제력 향상이 가족에 대한 여성의 새로운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기회비용이 증가하면서 자발적 미혼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혼기피 현상이 새로운 가족, 새로운 남성을 요구하고 있다.

여성의 과잉ㆍ이중 역할에 대한 저항도 아주 심하다. 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발달은 가정의 역할체계를 재구성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자기반성을 특징으로 하는 성찰적 근대성의 등장으로 남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성역할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의 변화, 사회적 인식의 전환, 제도적 강제 등이 맞물리면서 남성은 새로운 역할을 수용해야 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남성의 변화는 눈에 뛰지 않는다. 아니 변하려 해도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남성들 대다수는 여전히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만을 고집한다. 200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전국 900가구를 면접 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성들은 자녀 양육에 대한 아버지의 책임이 ‘경제적 부양’에 있다고 여기는 반면, 일상적인 자녀 돌봄 행위는 어머니 책임으로 여겨 이에 대한 참여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한국 남성들은 가사노동 참여에 소극적이다. 한국 아빠는 하루에 2.8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일본은 3.1시간이었으며 프랑스는 3.8시간, 미국과 스웨덴은 4.6시간이었다.

둘째, 새로운 역할에 대해 ‘받아들임’이 미숙하며, 이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겠다. 여성들이 힘들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가, 회사가 이를 감안해줄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남성의 생계부양자 역할에는 아직도 강한 문화적 압력이 작용한다. 조직 내 헌신과 몰입을 강요하는 직장문화는 자신의 새로운 가정 내 역할규정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고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이 기대하는 아버지ㆍ남편에 대한 역할 모델도 찾기 힘들고, 이에 대한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성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아내와 자녀가 기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셋째, 남성들은 가정 내에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고자 할 때 언제나 이중적 감정을 경험한다. 과거의 가부장적 아버지에 대한 환상과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강박관념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때문에 과중한 역할부담에 시달리는 여성의 분노와 이유를 알 수 없는 남성의 죄책감,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이 서로 교차하면서, 새로운 정서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정서적 갈등은 상호신뢰 속에서 풀 수밖에 없다. 양성평등의 새로운 역할정립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아내도 같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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