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삶, 그 씁쓸함에 대하여
어머니의 삶, 그 씁쓸함에 대하여
  • 김흥주
  • 승인 2009.11.10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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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관리체제에서는 아버지의 삶이 세간의 관심이었다. 산업화 역군으로서 고난의 생애를 보내 온 아버지를 재조명하고, 이들의 ‘기 살리기’를 통해 가족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회복하려 하였다. 최근 들어 미국발 금융위기의 해법은 희한하게도 엄마로 상징되는 ‘한국적’ 모성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모두가 어렵다는 지금, 헌신과 희생 또는 강인한 생력명의 상징인 엄마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엄마를 등장시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딸, 아들이 그려내는 엄마의 삶이 각기 다르다는 데 있다. 아버지는 아내의 따뜻한 보살핌을 기억한다. 아들은 어머니가 보여준 희생의 삶을 기억한다. 딸은 자신의 욕망을 거세한 채 살아야 했던 엄마의 상처를 기억한다. 영화 <마더>는 자식이 삶의 희망이고 이유였던 엄마의 비이성적 행태까지도 정당화한다.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은 무조건적 사랑이 존재 이유였던 엄마 세대를 보며 엄마처럼 사는 게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지 보여주고 있다. 각각 내용은 다르지만 접점은 ‘존재감’의 상실이다. 어머니들은 가정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 채 살아왔지만, 남편과 자식들은 엄마의 신화 또는 이미지 속에서만 어머니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우리 사회 50대 이상 여성들이 ‘어머니’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50년대 해방과 전쟁공간에서 어머니들은 자식들의 생계를 위해 기꺼이 일터로 나가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남편은 회사인간으로 가정을 떠나 있었지만 어머니들은 없는 살림 쪼개가며 자식공부에, 시부모 부양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30여 년. 자식은 결혼해 독립했고, 남편은 퇴직하여 돌아 왔다. 어머니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만 새로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첫째, 집으로 돌아온 남편과 불편하다. 어머니는 제2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가부장적 지배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 어머니의 삶에서 남편과 처음으로 시간을 같이하지만 모든 것이 어색할 뿐이다. 아내는 변화하려 하고, 남편은 과거의 기억에만 머무르려 한다. 미스매치로 인한 불협화음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단적인 예가 황혼이혼의 증가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8년 이혼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황혼 이혼은 지난 10년 사이 6배나 늘었다.

둘째, 자식과도 불편하다. 자식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좌절감과 박탈감이 크다. 어머니는 개인의 삶을 포기한 채 시부모 모시면서 자식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온갖 설움을 아들의 성공으로 보상받으려 했다. 하지만 성장한 자식들은 자기 자식만 소중할 뿐, 어머니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결혼해서도 어머니를 이용하려만 한다. 부모 주변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서적 공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살아온 어머니들은 자신의 희생적인 삶과 대비되는 자식들의 이기적인 태도에서 깊은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 때문에 느끼는 상실감도 크다.

셋째, 며느리와의 관계도 불편하다. 아들에게 모든 것을 희생한 이유는 그을 통해 존재감을 찾고, 잃어버린 삶에 대해 보상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변했다. 며느리 때문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서운하고, 이를 감추려 모질게 행동한다. 아들을 접점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항상 충돌한다. 그럼에도 돌봄 노동이 사회화되지 않은 한국 현실에서 어머니는 며느리의 부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며느리와 구조적으로 긴장관계지만 부양을 받아야 할 때는 의존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갈등과 의존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머니들은 혼란스럽다.

어머니의 삶은 힘들다.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찾기도 힘들고, 어머니로서 존재감을 찾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2009년 현재 어머니를 찾는 이유는 감당할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이다. 경제는 어렵고, 앞날의 희망은 사라지고 있는데 사회안전망은 허술하다. 그래서 전쟁 공간, 산업화 과정에서 온 몸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렸던 ‘엄마’의 기억으로 숨어들려 하는 것이다. 일시적인 미봉책은 될 수 있지만 구조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오히려 가정이, 사회가 어머니의 삶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 아닌 가?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신화적 존재로만 남는다. 이것은 껍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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