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책을 부른다
책이 책을 부른다
  • 박규선
  • 승인 2009.10.20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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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했지만 이 가을, 사람과 사람 사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있다. 바로 책과 책이다. 물론 책과 책을 이어주는 중매장이는 다름 아닌 사람이다. 나비가 제 온몸으로 꽃가루를 묻혀 이리저리 옮겨주듯이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책을 옮겨주고 책은 정작 또 다른 책을 옮겨주니, 책의 관계 지수(이런 게 실제로 있다면 말이다)는 우리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높다.

최근 책의 이러한 관계성을 증명하는 사례로, 일본의 유명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다 알다시피 조지오웰의 ‘1984년’을 패러디한 것으로 이 책에서 언급된 작가의 작품들이 다시금 재조명되면서 불황에 허덕이는 서점가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누구나 들어도 다 아는 안톤 체홉의 ‘사할린의 섬’,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또 이와는 직접 상관없지만 ‘테스’로 유명한 토마스 하디의 ‘이름없는 쥬드’도 최근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책이다.

또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에 발간된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에는 보석같이 빛을 발하는 좋은 작품들이 소개돼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할 사실은 그녀가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의 제안으로 시작한 <1년에 책 100권 읽기>는 50을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켜나가고 있는 독서의 생활화 원리이다. 그녀에게 독서는 그저 틈나면 조금씩 먹는 간식의 차원이 아니고 거의 주식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또 지난 해에 상영되었던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나’라는 한 친위대원 전력이 있는 여성이 어떻게 해서 암흑의 문맹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나가게 되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한나가 마이클을 만나면서 접하게 된 책들은 그녀의 역무원이라는 직업 상 꿈에도 그려볼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녀의 인생을 온통 사로잡고야 만다. 마이클과 한나는 인간적으로도 사랑했지만 그 둘의 사이에는 책이 있었다. 이렇게 책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거듭 태어나게 해 주고 한 인간의 자존감을 일깨워 주는 강력한 작용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일컫는 명작들을 배출한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점과 그 이전에 나름대로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겠지만, 이들을 새롭게 재조명해준 것의 출발점에는 한 거대한 울림을 갖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보다 책이 먼저 있었다!

우리 독서교육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요즘 청소년들은 그야말로 독서교육의 황금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서야 기본적인 학습의 시작이지만 진정 독서다운 독서교육이 강조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논술이 독서교육과 겹쳐지면서 순전히 다이제스트 식의 독서가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 물론 속독법은 나름의 장점과 효율성을 지니고 있지만 지식을 요약적으로 스캔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체화된 나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독서는 진정으로 자신의 오감과 영혼이 동원될 때 발생할 수 있는 4차원의 기쁨이요, 생활의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흐드러지는 술자리에서 술 한 잔 권하는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책 한 권 기꺼이 선물하는 데에는 여전히 인색한 것 같다. 과거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에 한 가정의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엥겔지수였다면 이제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로 문화가, 그리고 그 중심에 책읽기가 있다. 자 이제부터라도 내가 먼저 앞장서서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책 권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책 한 권 권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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