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길 전북산악연맹 상근부회장> 故 고미영 등반대장이 준 교훈
<김정길 전북산악연맹 상근부회장> 故 고미영 등반대장이 준 교훈
  • 이방희
  • 승인 2009.07.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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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히말라야 14봉 완등하면 동네잔치를 하고 싶어요.”

만년소녀처럼 해맑게 웃는 모습이 고왔던 故 고미영 대장이 팔순의 아버지께 보낸 마지막 편지의 첫대목이다. 그런데 갑자기 고 대장이 히말라야 14봉 완등의 약속을 어기고 한 줌의 유골이 되어 고향인 부안으로 돌아왔다. 어디 그뿐인가. 봉분과 비문도 없이 고향집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소나무동산에 평장(平葬)으로 묻히며 가족과 산악인들의 눈물까지 쏟게 했다.

산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다던 그녀가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추서 받고 뼈를 묻은 곳은 석불산 자락이다. 그곳은 또 고 대장의 조상 고희(高曦)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엎고 의주로 피난을 갔던 공으로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로 제주고씨의 얼을 기리는 효충사가 있어 더욱 옷깃이 여며진다. 장례를 마치고 찾아 뵌 고 대장의 부친 고재은 옹은 85세의 고령임에도 젊은이들보다 더 의연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조문객을 맞았다. 막내딸과 히말라야 등반을 같이했던 김재수 대장의 손을 잡으며 아들이 되어달라고 했다. 또 한국여성산악회의 배경미 회장과 회원에게는 딸을 삼겠다고 했다. 장례를 맡아 수고한 대한산악연맹이나 협찬사에게는 가족처럼 지내자고 했다. 백 마디 말보다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철녀(鐵女) 또는 고산등반의 귀재로 일컫는 고미영 대장(부안, 42세)은 오은선 대장(남원, 43세)과 함께 전북이 낳은 산악계의 거목이다. 또한 두 사람은 여성 산악인 최초로 7대륙 최고점과 3극점(남극. 북극. 에베레스트), 그리고 히말라야 14봉 완등을 목표로 세계 최초의 그랜드슬래머를 꿈꾸어 왔던 선의의 경쟁자였다. 특히 고 대장은 1997년부터 아시아스포츠클라이밍(암벽)선수권대회를 6연패하고 세계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였다.

원래부터 오 대장은 2010년, 고 대장은 2011년까지 히말라야 8,000m급 14봉 완등을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지난해 초 두 사람은 지현옥 여성산악인이 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지 10년이 되는 올 가을에 한국여성산악회원들과 서로 경쟁이 아닌 화합하자는 취지로 안나푸르나를 함께 오르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고 대장은 2006년 초호유 등정을 시작으로 올 7월 초까지 3년이 안 되는 기간에 11봉을 등정하고, 오 대장은 12봉을 등정하는 경이적인 대기록을 수립해 언론과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올부터 두 사람이 헬기까지 동원해가며 14봉 완등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자 선의의 경쟁 수준을 넘어서 협찬업체와 후원하는 언론사간의 기록경쟁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안나푸르나 등반 약속도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 와중에 안타깝게도 고 대장이 지난 7월 11일,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산악인들을 망연자실케 했다. 히말라야 14봉 완등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오 대장은 숨이 멈춰버릴 것 같다고 탄식했다.

산악인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고 대장의 일기장에 적힌 김재수 대장과의 애뜻한 사랑이야기였다. 또 측근에 의하면 히말라야 14봉을 완등한 뒤 김 대장과 사랑의 결실을 맺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디 이승에서 못 다한 히말라야 14봉 완등과 세계 최초의 그랜드슬래머의 꿈을 하늘나라에서라도 꼭 이루기를 14,000명의 전북산악연맹회원들과 함께 기원한다.

아무튼 히말라야 고봉 등정은 경험 많은 산악인들도 한 해에 1봉 등정도 버거워할 정도로 목숨을 건 고난의 길이다. 아무리 고산등반에 단련된 체력이라지만 한 해에 5-6봉을 등정한다는 것은 기상여건이나 체력으로 볼 때 애당초 무리였다는 게 원로산악인들의 중론이다.

한국인 에베레스트 최초의 등정자 고상돈과 대구출신 박무택 사고 때도 그랬지만 금번 고 대장의 사고를 통해 고산등반사고는 대부분 등정 후 하산도중에 일어난다는 교훈을 또 다시 얻었다. 그리고 전북산악연맹의 원정팀도 올해 히말라야 14봉 완등사업의 일환으로 다울라기리 등정에 성공한 고우석 대장이 하산도중 셀파와 부딪치는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히말라야는 제트기류, 눈보라, 낙석과 눈사태 등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늘 목숨이 위험하다. 따라서 산악인들은 고산등정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등반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정상에 오를 때 40%, 하산지점까지 30%의 힘을 사용한 뒤, 30%는 일상을 위해 남겨야 한다. 이는 모든 등산에 적용되는 교훈이다.

이제라도 산악인들은 소처럼 느리게 걷는 우보(牛步)산행의 진리를 터득하고, 정도에 지나치지 않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를 배워야한다. 아울러 정부는 국민들의 대중스포츠로 자리 잡은 산악자전거, 산악마라톤, 스포츠클라이밍, 일반등산 등 산악종목들을 전국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해서 엘리트체육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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