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장승이 있는 남원 마을②
21. ­장승이 있는 남원 마을②
  • 이지현
  • 승인 2009.06.3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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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영면 의지리 의지마을 돌장승

의지 마을은 의지리에 속한다. 의지리는 본래 운봉의 북하면 지역인데 1914년 월성과 의지마을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의지리라 하고 아영면에 편입되었다. 자연 마을로는 서정, 율동, 의지, 월성 등이 있다.

개암주 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개미 형국이라 하여 ‘개암주’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개암지, 개암주라 불렸다. 이를 한자화하여 의지(蟻池)라 부르게 되었다. 의지 마을은 옥천 조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김해 김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개암주 마을 돌장승은 마을입구에 마주보며 한 쌍이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옥천 조씨가 괴질을 막기 위하여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모두 관석으로 되어 있고 정면에는 아무런 명문도 새겨져 있지 않다. 오른쪽 장승은 소박한 안면형으로 눈썹, 눈, 코, 입, 수염 등이 간결하게 그려져 있으며, 왼쪽 장승은 호랑이형으로 수염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고, 눈 밑에 두 줄로 그려져 있는 것이 더욱 익살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두 장승 모두 앞뒤가 판판하고 두께는 얇으며 윗부분이 뾰쪽하여 남근을 연상케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장승을 벅수·돌비석이라 부르고 있었으며 내외 간이라고 한다. 장승의 본래 위치는 지금보다 마을 안쪽으로 현재 우물 뒤쪽 집 앞에 양쪽으로 마주보며 세워져 있었는데 199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의지 마을에서는 장승에 관한 특별한 의식은 없고, 아기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정월에 간단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개암주 마을을 비보하기 위한 비보장승으로 추측된다.

▲ 운봉읍 북천리 돌장승

북천리는 운봉읍내 ‘북쪽 냇가 마을’에서 유래한다. 임진왜란 무렵 파평 윤씨, 평산 신씨가 들어와 정착했으며 이후 송씨가 들어와 벽송동이라 부르다가 이곳에 객사가 세워져 객사마을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운봉읍 북천리 장승은 운봉면에서 인월로 가는 국도에서 왼쪽 신기리 쪽으로 50m정도 떨어진 북천 마을과 신기 마을 경계에 있다. 동방축귀대장군(東方逐鬼大將軍)와 서방축귀대장군 (西方逐鬼大將軍)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장승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명문상으로는 방위신장군류이다.

동방축귀대장군(東方逐鬼大將軍)은 많이 훼손돼 머리 형태가 일그러져 있으며 괴상망칙한 형태를 하고 있다. 또 드러난 이는 청승맞다. 서방축귀대장군(西方逐鬼大將軍)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기다랗게 내려진 귀는 부처를 연상케 한다. 불교조각과는 다르게 질박하면서 자비스럽고 친밀감을 주는 미륵형이다.

북천마을 변전소 옆에 예전에 짐대가 세워졌으나 6·25 이후에 없어졌다. 지금도 이곳을 ‘짐대거리’라 불린다. 짐대에는 오리를 올려놓았는데 이는 마을의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북천리 장승에 관한 특별한 의례는 없다.

▲ 주천면 호기리 돌장승

호기 마을에서 육모정 쪽으로 500m정도 떨어진 왼쪽 하천변 순열각 옆에 미륵이라고 불리는 장승이 위치한다. 이 돌장승은 지방민속자료 제 1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크기는 높이 270cm, 두께 35cm, 너비 80cm, 둘레 230cm,로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형태는 패랭이를 쓰고 있으며, 눈이 둥글고 코가 크며 볼은 불거져 나와 있고 웃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소박·투박한 모습으로 원숭이를 연상케 한다.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옷을 걸치고 있다.

마을 사람에 의하면 이곳을 미륵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들을 낳지 못한 어떤 처자의 꿈에 미륵(실상은 장승)이 나타나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집을 지어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그 여인이 자식을 보고 미륵의 집을 지어 주어 미륵정이란 명칭이 남게 되었는데 지금은 집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장승만 우뚝 서 있다. 이는 장승에 대한 기자신앙과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석장승은 근처 논 속에 묻혀 있던 것을 1850년경 김양근씨의 6대조 김기수씨의 헌봉에 의해 발굴하여 이 자리에 세웠는데 1978년에 정화했으며 김씨 가문에서는 이 장승을 보호했다. 매년 칠월칠석날이면 자손들이 모여 제사 지낸 뒤로 가세가 늘어 후대에 남원의 부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특별한 의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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