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의 방향은 어디로
공교육의 방향은 어디로
  • 박규선
  • 승인 2009.04.01 18: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의 모 초등학교, 입학식 장면이다. 교장이 연단에 오르고, 초등학교에 갓 들어온 새내기들을 환영하는 축사가 영어와 중국어로 통역되는 등 그야말로 멀티시스템으로 진행된다. 뒤이어 사랑스러운 후배들을 맞이하는 재학생 선배들의 외국어 축가 공연이 이어지고 장내는 신선한 충격으로 고요한 술렁거림이 인다.

한편 이 날 오전 모 대학에서도 역시 외국어에 능통한 최고의 지성인을 길러내는 학교답게 입학처장의 사회에서부터 입학허가 선언, 신입생 선서, 총장의 축사 등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영어로 진행된다. 다만 학부모와 내빈을 위한 우리말 안내장이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하는 주객전도의 상황, 중요한 대목에 있어서는 통역이 수반되는 이중적 사고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경우가 걸림돌이라면 걸림돌이랄까.

이것은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라 작년 초에 있었던 광경이다.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영어공교육 완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행해진 영어공교육 선진학교들의 모습이다. 마치 조지오웰의 1984년이 그려낸 가상현실이 실제 세계를 압도하듯 우리 현실은 이제 가상의 세계를 충실히 구현해 내고 있다.

오래 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영어공용화론이 이제는 영어공교육 완성 및 강화라는 명분에 힘입어 얼치기 주인 행세를 하려 드는 형국이니 왠지 신선한 충격이라기보다는 불안감이 앞선다. 게다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번다’고 영어공교육 완성이라는 명분에 살 판 나는 축은 사교육 시장이다.

안 그래도 우리 교육은 언제나 사교육 시장을 등에 업고 사실 공생공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사교육 시장을 의뢰하지 않을 수 없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기본적인 회화는 가능하게끔 한다는 취지 하에 시작된 영어공교육 완성 프로젝트는 영어로 하는 영어 수업을 감당할 교사 양성이라는 인프라 구축을 전제로 한다. 그러자면 예비영어교사들은 난해하고도 다층적인 영어교사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이제껏 공들여 왔던 이상으로 사교육 시장의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고 무엇보다 영어 교육적 환경에 노출돼야 할 학생과 학부모들은 이중삼중으로 사교육 시장에 의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다 보니 등이 휘는 건 학부모요 멍드는 건 학생들이다. 강남의 영어 유치원 수강비가 이것저것 합쳐 월 200만원을 웃돈다고 하니 학부모들은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 가며 자녀의 영어 사교육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판이고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영어몰입교육에 휘둘릴 판이다. ‘영어로 놀이 하면서’ 배워도 시원찮을 학생들이 이제는 영어라는 괴물에 질식당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아하, 어쩐다? 한숨만 쉬며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새삼 공교육의 위기를 논하기보다 슬기롭게 역공법으로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새정부는 영어공교육 완성 프로젝트를 백지화 하거나 원론적으로 재차 논의의 중심에 놓을 의사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치더라도 어떻게든 교육 활동은 행해져야 한다. 새삼스럽지만 ‘위기는 곧 기회’이다. 우리 교육의 마지노선, 공교육이 무너지면 안 된다. 비록 모든 교육적 화두의 중심에 제물처럼 ‘영어공교육 완성’이 있는 듯하지만 이것은 표면에 불과하다. 그 근저에 놓여 있는 공교육의 책무성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이 된 소년 반기문은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품었고, 50여 년 전 황무지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영어 공부 환경에서도 외국인을 찾아다니며 영어를 공부했고 김성태 영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나름 열심히 공부해 오늘날 거인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가족들은 “열심히 하는 것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고, 친구들은 “영어 공부에 미쳤다”라고 이야기했다. 환경을 탓하고 제도를 탓할 것 없이 혼자라도 열심히 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은 그 동안 다품종 대량생산 구조에 길들여져 결과 위주의 암기식, 반복학습에 의한 구태의연한 체제를 고수해 왔다. 문제사태에 직면했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과정 중심의 교육 체제는 마치 우리 체질과는 거리가 먼 어떤 것으로 간주돼 수준별 교육과정이라는 새로운 제도마저도 현실이라는 구차한 명분에 밀려 도태될 지경이다. 물론 현장과 이론 사이에는 엄격한 간극이 있다. 현장을 무시한 그 어떤 교육적 논리도 탁상공론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새 정부의 임기가 끝나는 그날까지 두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학교교육도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그 지경을 넓혀야 할 것이다. 평균적인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고 대량생산구조에 머물렀던 학교교육도 전통적인 존립 양태에서 벗어나 구(차)별화된 교육시스템을 발빠르게 받아들여 갱신의 몸부림을 시도해 볼 일이다.

또한 사교육비를 경감하고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학부모님들께서 자식의 소질을 정확히 파악하여 올바른 진로를 결정하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우릴 의무가 있음을 상기하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