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석탑 유물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
미륵사석탑 유물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
  • 김복현
  • 승인 2009.02.0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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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9일 문화재청장이 직접 미륵사지 사리장엄에 대하여 발굴과정과 발굴된 문화재에 대한 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에는 홍보도 하지 안했는데 지역인사들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리를 같이했다. 왜 이렇게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동안 역사자료가 미약하여 믿기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번에 발굴된 문화유산이 너무도 소중한 것이기에 그러한 것일까? 이유는 하나이다. 답답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좋은 소식을 고대하고 있던 차에 1400년 전의 신비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국보 중의 국보”라고 극찬을 하는 문화재청장의 설명을 듣고 자리를 함께한 문화재 애호가들의 눈빛은 사뭇 빛나는 것 같았다. 미륵사의 창건주와 시주자의 이름, 석탑건축 연유가 담겨있어서 백제 역사문화의 찬란한 모습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 유물은 1월 14일 해체 작업 중 석탑의 1층 심주(心柱)석 상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금제 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 은제관식과 도자, 원형합, 금제 소형판 등 500여점이 출토되었다. 이 같은 사리장엄이 잘 보관될 수 있었던 것은 사리공 위에 1.2t의 돌이 있었기에 도굴을 시도한 흔적이 여러 곳에 있었지만 안전하게 보존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탑에서는 사리장엄 장치가 기단하부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미륵사 석탑의 사리장엄이 1층에 있었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원래 심주석은 해체할 계획이 없었으나 심주석의 하단이 기울어져 있어 불안하기에 해체 수순을 밟은 것이 엄청난 역사를 발굴하게 되었다고 한다. 발굴 된 유물 중 금제 사리호는 심주석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고 높이 13cm 어깨 폭7.7cm의 작은 병으로 동체를 상하로 각각 나눠 제작하여 내부에 소형 사리병을 안치한 후 조립하여 완성될 수 있도록 한 이중구조로 되어 있으며,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백제 금속공예의 섬세하고 탁월한 세공기법을 보고 흥분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관심을 집중시킨 유물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로 가로15.5cm 세로 10.5cm의 금판에 음각하고 주칠한 선명한 백제인의 글자가 금판 앞. 뒷면에 한 줄에 9자씩 총 194자의 선명한 글자였다. 이 금판에는 가람을 건립한 분은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인 왕후가 기해년 정월 29일(639년) 왕실안녕을 기원하며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적혀있었다. 사택씨는 당시 백제 8대성의 하나로 부여 공주일대의 귀족이었다. 여기에서 미륵사는 백제 무왕과 왕비가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내용은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그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닐 가능성 제기는 심사숙고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는 삼원형식의 절이라 서탑만 사택씨의 왕후가 짓고 나머지 탑들은 다른 왕후들이 지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또한 기축년 (629년)이란 도장이 찍힌 기와가 미륵사 중원의 목탑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과 서탑 건립 2년 후인 641년에 사망한 무왕과의 관계를 연상해본다면 사택적덕의 따님은 후비일 가능성도 있으며 당시의 무왕이 통치하고 있던 백제의 정황을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향가인 “서동요”에도 분명하게 서동과 선화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함께 연상해야하며, 우리의 역사문화에서 보아왔듯이 왕의 위치는 왕비를 다수 거느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무왕도 왕비가 다수 있었으리라고 미루어 확증이 간다고 생각함이 어쩌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것 보다도 중요한 것은 금번 발굴된 세기의 유물은 미륵사라는 사찰이 분명하게 백제의 무왕께서 건립했다는 사실과 그리고 백제인의 금속 공예기술이 너무도 섬세하고 화려했다는 것 그로인하여 백제인의 높은 문화를 중국이나 일본에 자랑삼아 전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왕도를 익산 땅에 정했다는 논거로 삼아도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같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접하면서 자랑스러운 백제인의 역사적 유물을 익산에서 세계로 그 빛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발굴된 현장부근에 세계적인 국립박물관을 건립하여 이를 세계인에게 자랑하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언제나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내용을 그 나름대로 평가해야하는 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소임이라 생각하면서 익산을 방문하여 1400년 전의 찬란한 백제문화유산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나름대로 간직하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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