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아르키메데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
  • 소인섭
  • 승인 2009.02.0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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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는 기하학에서 더 큰 업적을 남겼다. 아르키메데스의 연구 업적중 유일하게 출판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수학 논문들뿐이다. 그는 원의 측정이란 논문에서, 원주율(파이)의 값을 구해냈다. 즉 원의 둘레와 원의 반지름의 비율를 정확하게 나타냈다. 그리고 그는 포물선의 넓이, 부피를 구하는 것과 공과 그 외접하는 원 기둥과의 관계를 밝혀내기도 했다. 그가 밝혀낸 방법은 2천년이나 지난 후에 아이작 뉴튼에 의해 발견된 미분학 출현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역학분야에서도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했다. 그는 지레의 원리를 발견하여 "내게 설 발판과 적당한 지렛대를 준다면 나는 지구를 움직여 보고 싶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으며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하여, 너무 커서 바다에 띄우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군선을 거뜬히 바다에 진수시킨적도 있었다. 또, 전쟁에 사용하는 투석기를 발명하여 전쟁에 직접 활용하였으며,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은 양수기에 응용하여 활용했다. 이 나선 양수기는 오늘날에도 이집트 나일강 유역 지방에서 물을 푸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헬리콥터 발명의 기본이 되기도 하였다. 또 일설에 의하면, 태양광선을 초점에 모은 요면경을 발명하여, 적군의 배를 불살라 버렸다고도 한다.

아르키메데스는 많은 군사 무기를 발명하여, 시라쿠사의 도시가 수개월에 걸친 로마군의 포위 속에서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로마군은 끝내 시라쿠사를 점령하고 말았다. 시라쿠사를 점령한 로마군은 그 동안의 고생과 많은 동료들의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점령지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 때에 아르키메데스도 생포되어, 예우를 갖추라는 로마군 상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개 병사의 칼에 희생되고 말았다.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87년부터 212년까지 생존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플루타크의 영웅전에 나와 있는 그의 최후는 매우 유명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참인 즈음, 로마 함대는 아르케메데스가 살고 있는 작은 도시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로마군의 지휘관 마르켈루스는 여덟 척의 군함을 연결하여 그 위에 높다란 하프형의 대를 만들어 대포를 설치하였다. 자만심에 들뜬 마르켈루스는 자신들의 명성만으로도, 많은 배를 보기만 하여도 시라쿠사인들이 항복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라쿠사인들은 아르키메데스가 만들어 낸 거대한 투석기로 몇 톤이 넘는 돌을 연이어 쏘아 로마군의 배를 파괴하였다. 또, 기다랗게 생긴 기중기와 쇠로 된 갈고리로 성벽 너머에 가까이 오는 배를 잡아 휘둘러서 바윗돌에 던져 가루로 만들어 버리거나 침몰하게 하였다. 그 후 정면 공격을 단념한 로마군은 배후에서 시라쿠사로 쳐들어왔다. 여신 아르케미스의 축제일에. 시라쿠사인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땅에 원을 그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로마의 병사 하나가 뛰어들어 그가 모래판에 그려놓은 도형을 밟고 지나가려 하자 아르키메데스는 "이 그림을 밟지마라!"고 호통을 쳤다. 무식한 병사가 이 위대한 과학자의 마음을 헤아릴 턱이 없었다. '시건방진 늙은이가 제 처지도 모르고'라는 욕설과 동시에 오랜 전쟁에서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이 로마 병사는 아르키메데스를 단칼에 베어 죽이고 말았다.

위대한 아르키메데스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침략군의 사령관 말케르스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몹시 가슴이 아파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인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빛내기 위해 원기둥에 구가 내접하도록 새긴 묘비를 세웠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기하학적 그림에 내포되어 있는 매우 아름다운 수학적 조화를 발견하고 늘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묘비를 삼아 줄 것을 가족들에게 부탁하고 있었던 사실을 사령관이 전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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