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 다시보기] 400번 물든 은행나무
[한옥마을 다시보기] 400번 물든 은행나무
  • 하대성
  • 승인 2008.11.27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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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막 퍼지기 시작한 아침나절, 홍살문을 지나 전주향교에 들어서니 눈앞이 화사하다. 마당에 좍 깔린 은행잎이 늦었지만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라는 듯 샛노랗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내내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고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은행나무들이 오늘은 적적해 보인다. 화려하면서도 품위 있어 보이던 황금색 잎을 다 떨구고 마치 홀가분하다는 듯 맨몸으로 서 있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마치 노오란 잎들이 은행나무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는데 잎사귀 한 장 달지 않은 은행나무들이 그 찬란했던 때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건 왜 그럴까?

전주 향교의 은행나무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수령이 400년 이상 된 여러 그루의 나무가 65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향교 건축물과 어우러져 멋스럽기도 하거니와 향교에 심어진 은행나무는 선비가 갖춰야 할 윤리도덕과 청렴결백을 상징하기에 의미가 크다.

만화루의 문턱을 넘어서면 오른편에서 당찬 아낙 같은 은행나무가 은행이 다닥다닥 달린 채 반긴다. 예스런 담장에 선처럼 그어진 담쟁이덩굴과 잘 어울려 그림같이 아름답다. 일월문 안으로 들어가면 대성전을 중심으로 내외라도 하는 듯 뻘쭉한 수나무와 암팡진 암나무가 양편에 따로따로 서 있다. 굳이 비유 하자면 유생들의 품위와 예를 갖춘 선비의 점잖은 모습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들은 항시 서로를 바라보며 꽃가루를 2km나 날려 보낼 만큼 열렬한 사랑을 나누는 나무다. 식물 중에 유일하게 정충이 있는 나무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사촌이 없는 나무라고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은행나무과 은행나무 1종만 있기 때문이다. 명륜당 앞에 있는 나무는 넓은 마당을 다 뒤덮을 만큼 은행잎을 깔아놓고도 기와지붕에도 담장에도 골골이 노랑 잎을 쌓아두었다. 이파리 새새로 은행이 지천이다.

올해도 첫눈이 오기 전까진 이곳 향교에 전국에서 출사 온 사진작가들이 하루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만큼 사진작가는 물론 멀리서 가까이서 전주 향교의 은행나무를 보러 온다니 명물이 따로 없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천년을 넘게 사는 강인한 생명력과 병충해도 범접하지 못하며 불에도 강해 화두목이란 이름까지 얻은 나무이니 찬사를 받을만 한 나무이다. <진화론>의 다윈은 은행나무를 가리켜 고생대부터 변하지 않은 “살아 있는 화석” 이라고 했다.

경기도 용문사나 충남 보석사의 은행나무는 천년을 넘게 살면서 나라의 변고나 난세를 알린다고 한다. 우리 고장 향교의 은행나무도 사람의 수명보다 몇 백 년을 더 살면서 전주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향교를 나선다.

/김춘자 도민기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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