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입구에서 조장(助長)을 생각함
겨울 입구에서 조장(助長)을 생각함
  • 이용숙
  • 승인 2008.11.0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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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7·8일경에는 겨울의 첫 관문인 입동 절기가 자리한다. 명실 공히 한로·상강을 거쳐 겨울의 입구에 들어서는 것이다.

모든 일에 ‘시작’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하루, 한 주일, 한 달의 시작부터 1년 1세기 또는 새천년이 모두 그렇다. 시작은 기대와 꿈, 설렘, 각오와 약간의 긴장감이나 불안까지를 수반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좋은 시작을 전제로 성실하게 일을 착수하면 어느 정도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이리라.

입동은 겨울의 시작이다. 어느 계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유독 겨울은 한해의 마무리라는 의미를 더한다. 겨울은 봄의 소망이나 여름의 격정과 가을의 성숙과는 다른 색깔로 다가온다. 여기서 겨울의 의미를 하나씩 짚어보자.

가을이 슬픈 전설을 상기시킨다면 겨울은 누군가의 지엄한 명령을 떠올리게 한다. 겨울은 단호하면서도 간결함이 그 매력이다. 우선 지상에서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봄부터 가을까지 천천히 바뀌어왔던 풍경을 한순간 확 바꾸어버리는 것이 겨울이다. 복잡한 색깔을 단순한 색깔로 줄인다. 때로는 눈을 내려 온누리를 흰색으로 덮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겨울에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도 간결해지고 단호해지기 마련이다. 지금까지가 현실의 세계였다면 겨울은 몽상과 추억의 세계다.


40년 가까이 교단에 서서 줄곧 무언가를 가르치려 애써왔지만, 자연의 크신 가르침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자신과 마주친다. 또한 어려서부터 시를 공부해왔지만, 인공적인 기교와 장치들이 자연의 오롯한 이법 앞에서 한낱 치기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문학뿐 아니라 그림이나 음악도, 다른 어떤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한다.

자기 다스림[修己]부터 가정, 사회, 국가의 경영도 다르지 않으리라. 봄이 오면 흙을 일구어 씨뿌리고, 여름에는 땀흘려 가꾸고, 가을에는 정성으로 수확해야 한다. 그래야만 훈훈한 겨울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여기서 자연의 이법을 일러준 『맹자』의 고사를 생각해 본다.


『맹자』 중 ‘公孫丑’에 조장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송나라의 한 농부가 묘목을 심고 며칠이 지나도 도무지 자라지 않는 것을 보고, 조급한 마음에 새싹을 하나씩 쑥쑥 뽑아 올렸다는 것이다. 그가 “묘목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었다.(助苗長)”라고 자랑하였으나, 사람들이 놀라 달려가 보니 어린 싹들이 모두 말라 죽었다는 얘기다. 조장의 사전적 풀이에는 ‘도와서 더 자라게 함’이라는 뜻과 함께, ‘무리하게 도와서 도리어 더 해가 됨’이라는 뜻이 적혀 있다.

서두른다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고, 충분히 잘 익을 때까지 끈기 있게 가꾸고 기다려야 한다는 맹자의 교훈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원칙과 과정을 무시하고서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경계해야 한다. 더러 단기적인 성과는 얻을 수 있지만, 길게 보면 오히려 낭비와 퇴보를 초래하는 일이 허다하다.

가정이나 기업, 나아가 국가 등 어떤 조직이든 간에 조장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없고 초조한 리더일수록 무리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조직의 목표와 실정에 맞지도 않고 또 지켜질 수도 없는 정책과 규정을 만들어내며, 이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려 할 때, 자신과 함께 구성원들로부터 크고 작은 저항에 부딪힌다. 결과적으로 조직의 권위와 시스템의 효율은 추락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잘 설계된 기본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며 제대로의 과정을 따라야만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연에서 배우는 순리이다.


모두가 어렵다고 한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국제적으로도 환난에 직면하지 않은 곳이 없는 듯하다. 경제도 자원도 환경도 심각한 파국이 목전에 몰려오는 것 같다.

이런 때일수록 희망의 끈을 그러쥐어야 한다. 우선 나부터, 그리고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면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기로 하자. 겨울 입구에서 한해를 돌아보고, 계절이 주는 준엄한 명령을 따르며, 다시 일어서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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