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혜미자·김선주 한지공예 모녀
30. 김혜미자·김선주 한지공예 모녀
  • 김경섭
  • 승인 2008.09.0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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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 공예가 김혜미자 교수와 딸 김선주씨가 한지공예의 매력을 말하며 웃음짓고 있다.
손끝은 무르고 지문도 지워진지 오래다. 한지에 색을 입히고 문양을 파내며 하나씩 완성되어 가는 작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들, 한지 공예가 김혜미자 전주 기전대 교수와 딸 김선주씨. 닮은 듯 서로 다른 두 사람은 엄마와 딸이라는 필연적 관계를 벗어나 한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각기 다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9월의 초입에 찾아간 김 교수는 여전히 제자들을 가르치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서랍장에 붙여 넣은 글자가 너무 커 여백이 없다”며 “떼어 내고 다시 붙일 글자들을 파는 중”이라는 그의 모습에서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투철한 장인 정신이 엿보인다.

1980년대 중반, 당시 전주에서 꽃꽂이 연구가로 입지를 다졌던 김 교수는 어느 날 텔레비젼을 통해 한지 공예를 알게 된 후 40대의 나이에 한지 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오색한지공예연구회 상기호 선생과 충남무형문화재 최영준 선생이 그의 스승. 새벽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가며 3년여의 공부를 마친 그는 전국의 박물관을 순례하듯 돌면서 유물을 스케치하고 동행한 목수와 유물들의 치수를 일일이 재면서 밤낮 없이 작업을 해왔다.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그저 어떤 작품이 탄생할까라는 기대감으로 밤을 새우며 작업을 했던 날들이 대부분이었죠. 자르고, 파내고, 붙이고. 덕분에 지금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지만(웃음).”

김 교수는 슬하에 세 딸을 두었지만 맏이인 선주씨만이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한지 공예가의 길을 걷고 있다. 곱고 단아한 얼굴선이 꼭 닮은 두 사람. 그러나 성격은 극과 극을 달린다.

본인의 의지를 중요시하는 선주씨와 타인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김 교수는 서로 “가장 안 맞는 사이”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미리 작업을 완성해 놓고 남은 여유를 즐기는 엄마와 여유롭게 시간을 두고 완성 기한을 딱 맞춰 작업한다는 딸. 대화중에도 여전히 옥신각신 의견이 분분하지만, 서로의 ‘다름’안에서 조화를 이뤄가는 두 사람의 단단한 신뢰가 엿보인다.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한 선주씨는 4년여 동안 일본유학생활을 거치며 번역 전문가 자격증도 땄지만 어학에 별 매력을 못 느꼈단다. 그러던 중 1993년 첫 개인전을 열었던 어머니를 돕기 위해 작업을 거들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예전에 내가 꽃꽂이 할 때는 꽃을 쳐다보지도 않던 애가 한지 공예에 보이는 집중과 애정은 남달라요. 언젠가 며칠 동안 일 때문에 집을 비웠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애지중지 키워 온 꽃나무에 물을 안줘서 말라 비틀어 진 적도 있다니까(웃음).”

한 달에 4~5권의 책을 읽는다는 선주씨는 독서광인데다가 요리도 좋아해 주변에서 음식점을 내보라는 권유도 받는단다. “책 읽는 것이나, 음식 만드는 것 모두 그냥 좋아하는 것 뿐인데요, 뭘.” 그래서일까. 좋아서 하는 일은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의 실력을 보이는 선주씨의 한지공예 수준은 어머니인 김 교수가 봐도 제법이다.

“내가 하라는 데로는 절대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응용력이 상당히 좋아요. 전통문양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 내는 솜씨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가까운 곳에 훌륭한 스승을 두고도 선주씨는 어머니의 스승이기도 했던 상기호 선생에게 더 많이 배웠다고 한다.

“엄마와 저는 너무 성향이 달라요. 작품 분위기도 다르고요. 어쩌다 보니 한지공예가의 길을 가고 있지만 왜 하고 있는지, 왜 좋은지는 스스로도 설명이 불가해요.”

두 사람 모두 지호, 지승, 장지, 전지 공예를 모두 섭렵했지만 색 잘쓰기로 소문난 엄마는 장지공예를, 문양에 관심이 많은 딸은 전지공예를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만들 때 두 사람의 호흡도 척척이다.

그러나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가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한지공예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어머니 덕에 각종 공모전에는 출품조차 할 수 없었던 선주씨. 야문 손끝과 감각을 지지고 있는 딸의 솜씨를 알고 있는지라 어머니는 이 부분이 가장 미안하다. 그 많은 제자들은 제대로 가르쳐 큰 세상으로 내보내면서도 정작 핏줄에게는 모진 마음을 먹어야 하는 어미의 마음 한켠은 항상 아리다.

“내가 공모전에는 못나가게 했어요. 일부 공모전에 출품해 상을 받기도 했지만 특히 지역에서 열리는 공모전은 더더욱 못나가게 했지. 실력이 아닌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그래서 나 스스로는 당당한데 우리 딸에게 가장 미안해요.”

그러나 선주씨는 “당연한 이치”라며 담백하게 말한다. “만약 상을 받으면 엄마 덕이라고 할테고, 못 받으면 엄마가 한지공예가인데 실력이 왜 그 정도 밖에 안되냐고 욕을 먹었을거에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의 유무가 아니라 ‘얼마나 본인 작업에 충실한가’인 것 같아요. 예술은 학벌과 자격증으로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지난해 한지공예인생 20년을 망라한 개인전을 가졌던 김 교수는 요즘 우리 한지공예작품들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일본과 유럽 등을 오가며 한지공예품의 우수성과 상품성을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옛날 한지가 얼마나 지혜롭게 쓰였는지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며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통해 한지공예의 격조를 높이기 위한 그의 노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또 한지공예품 브랜드 '지사랑‘을 운영하고 있는 선주씨도 한지공예품의 상품화를 통한 대중화를 꿈꾸고 있다.

“한지 고유의 색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전통문화상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한 상품들이 제 값에 팔릴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는 것도 한지공예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 같아요.”

천년의 세월을 이어 온 한지. 그 한지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는 모녀의 손끝은 오늘도 여전히 분주하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두 사람은 한지와 함께 할 때 이유 없이 마냥 좋고 행복하다. 오랜 숙련으로 익힐 수 있는 ‘기술’을 벗어나 조화와 아름다움, 그리고 혼이 깃든 ‘예술’로써의 작품 세계를 펼쳐가고 있는 어머니와 딸의 모습에서 전통을 만들고 지켜가는 이들의 장인 정신을 만난다.

김효정기자 cherry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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