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3>
유산<3>
  • 이수경
  • 승인 2008.09.0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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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소리로 말해주었지만 아무 표정도 없다. 알아듣기는커녕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쳐다 볼뿐이다.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세상에 단 하나 있는 자식이 얼굴조차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누구셔?”

어머니는 예전의 그 곱던 얼굴이 아니었다. 볼이 홀쭉하게 패이고 두 눈이 쾡 하게 들어갔다. 식사를 제대로 하는데도 오히려 더 여위어 간다는 것이다. 나이 탓일 것이다. 병이 낫기는커녕 더 깊어만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침에 머리를 빗겨드렸는데도 소용이 없네요.”

병세가 더 악화되는 것이 미안했던지 간병사가 변명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 따지고 보면 평생 행복이라는 단어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 온 어머니다. 어린 나이에 유부남의 꼬임에 빠져 처녀의 몸으로 대두를 낳았다.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였다. 불륜으로 생긴 자식을 혼자 키우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첩살이에 남편의 병간호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폐병에 걸려서 큰집에서까지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다.

“어머니 어찌 할까요?”

“둔덕리에 우리 대두 있어.”

용케도 기억을 한다. 간병인의 말을 빌면 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언어는 오직 둔덕리와 대두의 이름뿐이란다. 정신을 놓기 전까지 오직 대두 하나만을 위해 살았던 어머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자신의 인생을 몽땅 훔쳐 가버린 남편의 부음을 듣고도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런 느낌 때문인지 오늘따라 어머니 얼굴이 더 슬퍼 보인다. 맑은 정신에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직도 아버지에게 애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까? 마음속으로 슬픔이 느껴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머니가 씩 웃었다. 천치처럼 웃고 있는 어머니를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나고 말았다.

화가 난다.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억하심정이 밀려온다. 기억조차 지워버리고 살아온 아버지다. 한데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지고 있는 것은 갑자기 전해진 부음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슬픔은커녕 미치게 속이 뒤집힌다. 마음 같아서는 장례식에 참석조차도 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살아서도 만나지 못하던 아버지다. 이제 와서 형식적인 예법 따위를 갖추고 싶지가 않다. 애틋한 정 따위는 남아 있지도 않다. 아니 부자지간이라는 천륜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이제 와서 큰어머니와 이복형을 혈연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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