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청춘
백수 청춘
  • 김원규
  • 승인 2008.09.03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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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중에 어른 한 분이 있다.

미수(米壽)를 넘긴 아담한 체구에 정갈한 분.

어찌나 총명하신지 펀드는 어떻고 보험은 왜 필요하고 등등,은행원 못지 않게금융상품 지식을 갖고 있다.

고객으로 인연을 맺은 지 벌써 수년이 된다.

그는 요즘의 택배회사라 할 수 있는 호남정기화물 정읍지사를 경영하여 궁색하지 않을만큼 만큼 돈도 벌었고, 2남2녀의 자녀를 교수, 의사, 은행지점장으로 훌륭히 키워 내셨다.

인생은 나선형이라 했던가.

어찌 그 어른이라고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는 한때 공직에 몸을 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고지 정읍에서 본인이 원하지도 않은 남원으로 발령이 나버린 것이다. “이 무슨 날벼락이람!” 그는 여인숙에 홀로 앉아 눈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기계처럼 일한다’는 평판을 들을 만큼 성실하였지만 그게 무슨 소용잇으랴.

공무원에게 발령은 수용해야 할 명령이다.

교통편이 불편하고 주5일제 근무도 아니던 때라, 결국 가족과 상의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생업이 막막했다.

두 손 내려놓고 가장노릇을 어찌 한담.

그는 일면식도 없는 호남정기화물 사장께 찾아갔다.

정읍지사의 설립을 요구하여 승낙을 얻어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매달렸고 사업은 번창했다.

난관을 기회로 이끌어 전화위복의 인생을 이룬 것이다.

요샛말로 플러스 발상과 긍정의 힘을 발휘한 셈이랄까.

며칠 전 그 어른이 오셨다. 부임 이후 첫 만남이다.

자리에 앉더니 ‘견아중생 환희발심(見我衆生 歡喜發心)’이라 쓰셨다.

모든 사람이 나를 보면 기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지점장이 예전에 써 준 글이야. 이 말, 기억하고 있지!”

기억이 없는 경구를 또박또박 적어 주시는데, 어른 앞에서 왠지 자꾸만 왜소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그는 내게 라이프 코치이시다.

이따금씩 우리 지점을 들를 때마다 좋은 한문경구를 주시곤 한다.

나의 부임에 한 말씀 주셨다.

불경일사 부장일지(不經一事 不長一智)’라고.

한 가지 경험을 겪지 아니하면 한 가지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내 덧붙이셨다.

욕존선겸(慾尊先謙)’ 곧 ‘존대를 받고 싶으면 먼저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위에서 아래로 쓰는 세로세대야. 요즘의 가로세대는 예의범절이 약해”

젊은이들에 대한 경고성 훈화다.

언젠가 그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탁자 위에서 ‘한문단어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어단어장’이야 들어보았지만 웬 한문단어장?

젊은이! 머리를 안 쓰면 이상한 병이 찾아올 수도 있다네.”

일 주일이고 한 달이고 외워지지 않으면 넘기질 않아요.”

그 분과 할머니의 말씀에서 어찌 교화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신문을 즐겨 읽고 모 단체의 고문으로 활동하시는 모습에는 활기가 가득하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여쭤 보았다.

큰 욕심 버리는 거야.”

지금 우리는 노령화사회에 살고 있다. 세월의 흐름을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없다.

나는 미래의 노인으로서 귀담아 들었다.

세상에 공짜 없는 법이야.”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배운다.

세상을 너무 쉽게 살려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보약이 되는 말씀이다.

단지 고객이 다녀가는 거라고 넘긴다면 오히려 내가 많은 지혜를 잃어버리는일이 될 것이다.

잠깐 만나는 시간에도 그 분은 나에게 살아가는 방법과 길을 이야기해 주신다.

“난 백 세는 넘길 거라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이미 지천명에 접어든 내가 무얼 바라겠는가.

이 어르신처럼 나이 들고 싶다.

신○○어르신! ‘백수(白壽) 청춘’을 빕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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