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를 슬프게 하지 말자
선구자를 슬프게 하지 말자
  • 장선일
  • 승인 2008.08.19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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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전 필자는 연변대학교 의과대학 연변병원의 초청으로 「아토피 피부염의 병리적 상태와 새로운 치료전략」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후 연길시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용정의 대성중학교와 일송정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일제 강압 치하에서 벗어 난지 환갑을 넘긴 해를 맞고 있어서 특별히 감회가 새로웠다. 위대한 민족의 저항시인을 낳은 곳 대성 중학교에 들러 선구자들의 민족 항쟁사를 견학하고 곧바로 일송정으로 향했다.

아마도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선구자」라는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선구자」 노래를 마음속으로 부르면서 일송정 길에 올랐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오르는 길이 너무나 험해 우리가 타고 간 승용차로는 도저히 갈수 없어서 하부가 약간 높은 차로 교체해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있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는 필자에게 역사적인 일송정을 보여 주려고 필사적으로 운전 했지만 차의 하부를 긁고 있었다. 계속해서 오를 수 없게 될 지경이었지만, 일송정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필자가 운전을 자처했다. 빗물에 길이 깊이 파여 오르는 길은 더욱 엉망이었다. 길가에 붉은 지붕의 노인복지 센터와 사람의 손길이 없는 거의 폐허상태의 식당이 있었다. 가까스로 일송정에 오르니 정각이 한눈에 들어 왔다. 그 옆에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안내한 연변대학 교수의 말을 빌리면, 원래 일송정에는 다섯 아름이나 되는 정자 모양의 한 소나무가서 있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 밑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항일의 의지를 다지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항일 투쟁의 발산지를 일제가 가만 둘리 없었다. 그 늠름한 자태의 소나무를 껍질을 벗기고 구멍을 뚫어 후추가루를 집어넣어 고사시켰다고 한다. 밟히면 밟힐수록 선구자들의 항일 투쟁은 더욱더 활발히 전개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차로 약 30분 떨어진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차로 1시간쯤 떨어진 봉오동에서 홍범도 장군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떠올리면서 한참을 말없이 역사 기행을 했다

중국은 항일 투쟁의 씨알이 된 이곳을 기념하기위해서 1980년대 후반에 소나무가 있었던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작은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일송정의 모습이다.

눈을 들어 주위를 살피니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을 휘돌아 용정시내로 말없이 천년을 흐르는 강! 바로 해란강이 눈에 들어 왔다. 용정은 1877년에 우리민족이 개척한 민족의 도시라 한다. 일제는 우리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용정을 그들의 만주국의 본거지로 삼아 대륙침공을 계속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에 저항하는 독립군이 일대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가져다준 선구자들의 활약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잠시 주위를 살피니 웅장한 선구자의 비가 있는 옆에 찢겨지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초라한 선구자의 집이 있었다. 방문날이 월요일이었지만, 한 두사람 오고 갈뿐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원래 일송정은 한국 관광객이 주로 들리는 곳 중의 하나라 했다. 그런데 요즘 한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없어 저항정신의 상징인 일송정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자본의 노예로 살면서 너무 실효성만 따지고 즐기려는 속성이 낳은 산물이 아닐까?

초라한 선구자의 집을 보면서 당시의 용정의 노래를 지은 윤해영 선생의 심정을 떠올리면서 「선구자」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윤해영의 노래 말로 알려진 「선구자」는 원래는 「용정의 노래」였다 한다. 윤해영은 용정 출신으로 나라 잃은 슬픔에 망연자실하던 중에 심기일전의 자세로 나날이 꺼져가는 동포들의 저항심을 회생시켜 보려고 이 가사를 썼다. 윤해영 선생은 어느 해 겨울 조두남선생에게 자신이 지은 가사에 곡을 부탁했던 것이다. 조두남 선생은 후에 「용정의 노래」를 선구자로 고쳐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용정을 무대로 한 이 노래 속에는 황금보다도 값지고 귀한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의 정기가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쓸쓸한 선구자의 집을 뒤로하고 북한과 국경지인 두만강 국경선을 향해 출발했다. 말로만 듣던 우리 분단의 아픔을 보게 되었다. 멀지 않은 두만강(도문강)다리에서 북한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야할 산이 민둥으로 변해 있고, 산꼭대기에는 보일락 말락한 옥수수 밭이 살짝 걸려 있었다. 두만강 주위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레프팅을 줄기고 있는 동안 침묵의 북한 땅에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초라한 초소에 병사들이 탈북자를 감시하고 있었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연길시에 있는 모아국립산림공원에 들려 마음을 달래 보았다.

경제와 이념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가치를 소중히 하는 우리 민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환갑을 지난 요즘 선구자의 슬픔이 뭔지 우리는 알아야 하겠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장선일 / 전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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