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대표의 시련과 도전
정세균대표의 시련과 도전
  • 이보원
  • 승인 2008.07.0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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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원<정치부장>
그때만 해도 가방이 귀했던 시절이라 아마 이 초딩 5학년생은 교과서와 공책을 책보에 돌돌말아서 어깨에 각개로 둘러메고 학교에 다녔을 법하다.

그날도 이른 아침 학교로 향하던 등굣길, 우연히 동네 담벼락에 붙어있던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를 보게 된다.

포스터를 보면서 먼 훗날 자신이 포스터안 주인공이 될 것을 상상하면서 이소년은 선거기간 며칠 동안을 즐겁게 통학을 했노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또래 아이들이 개울에서 멱감고, 참새 잡으러 들로 산으로 쏘다닐 때 이소년은 소꼴을 베고, 자신의 키 보다 큰 나뭇짐을 지고 낑낑대야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어린 시절의 고생스럽던 기억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고 한다.

바로 6일 전당대회에서 제1야당 대표로 선출될 민주당 정세균 대표의 어린 시절 회고담이다.

그의 정치적 야망은 아직도 미완성이자 현재 진행형이겠지만 깡촌인 장수군 장계면 개안들이라는 산골짜기 오지출신이 제1야당의 대표자리에 오른 것은 분명 ‘개천에서 용난’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담벼락 포스터를 보고 국회의원의 꿈을 키운 그가 4선의 중진의원 반열에 오르고 야당 대표로 선출되기까지는 꿈을 이루고자하는 강한 신념과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무려 세 군데나 옮겨다녔을 정도로 학력이 복잡하다.그가 처음 진학한 고등학교는 무주군 안성면에 있는 안성고등학교. 하지만 한학기도 채우지 못하고 전주공고로 전학을 갔다.꿈을 이루려면 아무래도 좀더 넓은 데로 나가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업고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인문계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고심 끝에 무턱대고 전주신흥고 교장을 찾아갔다.‘1등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는데 장학금을 안주면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된다’고 간청해 장학금과 전학을 허락받았다.그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며 회고한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원하는 학교를 다녔고 신흥고 개교 100년만에 처음 금배지를 단 졸업생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동안의 성공과 정치적 입지에도 사실상 그의 시련과 도전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민주당은 수권 10년만에 야당이 됐다.

정세균 대표에게는 대선과 총선을 거치며 무너진 당의 대오를 정비하고 지지기반을 곧추세워야 하는 책무가 주어졌다.

민주당이 시도하고 있는 변화와 화합은 당의 생존을 위한 기본이다.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의 폭등,우리 경제의 끝모를 추락은 민생을 피폐로 내몰고 있다. 쇠고기 정국은 MB정부의 국민적 신뢰도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하지만 ‘MB정부의 추락=민주당의 상승’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데 민주당의 고민이 깊다.

여당 때도 그랬지만 그동안 대안야당으로서 국민에게 강한 신뢰감을 주지 못한 자업자득이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다.강한 신념은 운명을 바꾼다고 한다.굳은 신념을 갖고 성공 가능성을 믿는다면 그도 성공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지 않겠는가. 나아가 정대표의 성공이야말로 전북의 미래일 수 있기 때문에 도민들은 그의 성공을 숨죽이고 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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