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자산, 그런 이름은 없다
치명자산, 그런 이름은 없다
  • 이용숙
  • 승인 2008.06.2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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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은 앞서 호영남에서 밝힌 적이 있다. 이름을 바르게 하는 일은 모든 일의 근원적인 출발이자 엄숙한 명령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는 그 정도를 넘어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동해’를 일본해로, ‘독도’를 ‘다께시마(竹島)’로 표기하며 침략적 야욕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공주 시에서 부여 쪽으로 가다보면 공주교대 뒤에 ‘일락산’이 있다. 말 그대로 해가 지는 산이다. 그 이름을 일제 침략자들이 ‘월락산’으로 둔갑시켜 부르게 한 것. 오래 전 공주문화원의 기관지 「공주문화」에서 칼럼 청탁을 받고 월락산의 이름부터 바로 잡아 되찾으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 해가 지든 달이 지든 상관이야 없지만 ‘日落山西下 月出東嶺上’이 아니던가. 달 지는 거야 초승을 제외하고 한밤중에 지니 누가 보겠는가. 그랬더니 그 지역 언론에서 서둘러 본래 이름 일락산으로 바로잡았다.



이름 하나에도 역사 문화가

산이나 강이나 다리나 호수에도 각기 고유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 속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다. 지역의 전통·정서·긍지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근 광주가 80년 이후 ‘빛고을’이라 부를 때, 우리 전주도 멋진 우리 토박이 이름을 찾고자 애를 태운 적이 있다. 솜리처럼 한밭처럼 달구벌처럼 지역 정서에 걸맞는 이름을. 그러다가 ‘어린이 민속 큰잔치’를 열면서 ‘온고을’이라 쓰기 시작한 것이 오늘은 누구나 어디서나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새로운 이름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았다면 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온’은 ‘완(完)’, ‘전(全)’ 이외에도 ‘원(圓)’, ‘온(溫)’, ‘온(白)’ 등의 한자음이나 훈을 빌린 것이기도 하다. ‘온’에는 ‘①온전하고 흠이 없다 ②뚜렷하게 갖추어져 있다 ③순수하고 티가 없다 ④ 모든 것을 한데 어우르다’와 같은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우리 대학교 연구실에서 창으로 바라보면, 벼랑의 모양이 마치 고깔을 쓴 중(승려)들이 늘어선 것처럼 보이는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름하여 중바우 또는 승암산, 더러 성황산이나 부르기도 했다.

한글학회에서 간행한 「한국지명총람」에는 ‘발이산 동쪽에 있는 바위 벼랑으로 된 산’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승암사와 승암산성이 있으며 후백제의 도읍이 있었다고도 전한다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비단 이 문헌뿐이랴. 전주의 고지도나 역사 유적의 모든 문헌에 이 승암산이 수없이 등장한다. 학창시절 이 바위벼랑을 오르내리지 않은 전주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만큼 꿈과 사랑과 낭만이 소담하게 배어 있는 그리운 이름 중바우다.



치명자산이라니 웬 잠꼬대

‘치명자산’이란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2·30년 전만 해도 그렇게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도로 표지판부터 적갈색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 표지석이 들어서고 안내판이 세워지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수천 년 이어온 지역의 역사와 문화, 전통, 정서들은 깡그리 무시해도 좋다는 말인가. 설사 힘이 있는 권력자라 해도 그런 만행은 용서받을 수 없다. 또 도로표지를 담당한 행정기관은 무슨 얼빠진 망발인가. ‘중’이라면 또는 ‘승려’라면 기분이 언짢은가. 그러고서도 일본해나 다께시마를 탓할 자격이 있는가.

‘치명’은 사전에 ‘죽을 지경에 이름’이라 풀이되어 있다. 그리고 기독교 용어로는 ‘천주와 그 교회를 위해 목숨을 희생함’이라 쓰여 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천주교회 전래 초기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동정을 지킨 며느리 이순이(루갈다)의 합장 묘지가 있는 거룩한 성지다.

그렇다고 해서 중바우가 결코 치명자산이 될 수는 없다. 천주교 신부님과 사목회 지도자를 만나 그런 얘기를 전해도 묵묵부답이다. 여기서 감히 제언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수수만년 역사와 문화는 모든 이의 공유물이다. 그토록 거룩한 성지가 역사 문화를 왜곡하는 오명을 벗으려거든 ‘승암산 치명자 성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이용숙<전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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