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혼과 우리말
우리의 혼과 우리말
  • 이용숙
  • 승인 2008.04.23 1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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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언어는 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래 ㅏ, 곧 는 세상에 태어난 어린아이의 입이 처음 열릴 때 자연스럽게 발음되는 기본모음인 것이다. 그리고 ‘ㄹ’은 자음 가운데 가장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유일한 유음(흐름소리)이다. 조음위치가 좁혀져도 기류의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마치 물 흐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생명의 탄생도 알에서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몸을 받으면 곧 육신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운전하는 것이 곧 언어다. 그런데 알의 모음교체에 의해 형성된 어휘가 ‘얼’, 즉 영혼이다. 영혼과 육체는 별개의 것이 아닌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의 것이다. 영과 육을 두루 건전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영육쌍전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의 지상명제다.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운 삶은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균형과 중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에는 영혼이 깃든다. 그것을 ‘언령(言靈)이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고 · 인격 · 사상이 좌우된다.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바르고 고운 사람이 된다. 또한 바르고 고운 사고와 성품을 지닌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의 언어가 바르고 곱기 마련이다. 한자어나 영어를 즐겨 쓰는 이는 그의 인간적 풍모까지도 중국이나 영미 지향적 틀을 드러낸다.

TV의 어느 학습지 광고에서 하나 둘 셋 넷을 비하하면서 1,2,3,4 학습법을 과시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전자는 비능률적이고 후자가 유용한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해석이다. 여기서 1,2,3,4는 물론 한자어 一二三四의 의미이다. 과연 그럴까. 고유어는 한자어보다 음절수가 늘어나서 ‘일’해도 되는 것을 ‘하나’로 읽어야 하니 비능률일까.

1, 2, 3, 4와 하나 둘 셋 넷

결코 그렇지는 않다. 한민족이라면 ‘하나’라는 소리의 틀이 ‘일’보다 두 배 복잡하고 힘들다는 인식은 아무도 갖지 않는다. 하나에는 우리의 넋이 배어 있기에 그렇다.

입으로 전화번호나 주민등록번호를 말할 경우 일과 이, 삼과 사는 언제나 혼동된다. 그래서 재삼 확인하고 반복해야 안심이 된다. 이 경우 하나와 둘, 셋과 넷으로 얘기하면 적어도 배달민족은 재론할 필요 없이 분명히 각인하는 것이다. 필자는 연구실 전화번호를 말할 때 ‘7128’을 ‘칠 하나 둘 팔’이라 말한다. 단 한 사람도 되묻는 경우가 없다.

언어에는 생명이 있다. 신생-성장-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언중이 자주 사용하면 생명력이 강해지고,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순수 고유어로 숫자를 세어 보자. 하나-둘-셋…열-스물……. 아흔아홉에서 막힌다. 백은 한자어다. 우리 민족이 애초에 두 자리 수까지만 인식하고 그것만 활용한 미개종족이라면 할 얘기가 없다. 그런데 아니다. 百도 千도 우리 고유어가 있었다. ‘온’과 ‘즈믄’이 그것이다. 이 말은 한자어 유입 이후 사용하지 않으니까 사어가 된 것이다.

이은상님이 쓰신 어느 선각자의 비문을 본 적이 있다. “골잘해에 길이 빛나시리.”라는 표현을 보고 놀랐다. 대사전을 보고 가까스로 알게 되었다. 골은 만(萬), 잘은 억(億)의 옛말이었다. 올해는 단군기원으로 4341년이다. 고유어로 적으면 ‘네즈믄 세온 마흔한 해’인 것이다.

아름다운 옛말 되살려야

오죽 우리말을 홀대했으면 山이나 江이란 고유어조차 사라지고 東西南北의 방향어조차 죽어버렸을까. 모두 아는 것처럼 山은 뫼요, 江은 이었고, 동서남북은 ‘새-하늬-마-노’였는데 고유어를 버리고 한자어만 즐겨 쓰다가 사멸하고 만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우리말이 외래어에 밀려 홀대받고 있는가.

새 정부가 밝힌 영어 공교육 실천 방안에 대한 논란이 많다. 영어 실력이 글로벌시대의 국가 경쟁력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정책이다. 이전에도 누누이 강조해 온 것처럼 어느 개인이나 몇몇이서 국가 백년대계를 흔들지 말고 권위 있는 전문기관에서 검토하고 설계해야 된다. 시행착오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영어교육의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다만 언어에는 영혼이 있으니 교육정책은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훌륭한 외국어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국어지식을 충분히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말도 바르게 알지 못하면서 영어만 유창하다면 그 사람을 어디에 쓸 것인가. 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이용숙(전주교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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