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鄭)나라 사람 신발을 사려하다”
“정(鄭)나라 사람 신발을 사려하다”
  • 김경섭
  • 승인 2008.03.31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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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를 여관으로 생각하고 언제든지 새처럼 훌쩍 떠날 준비를 하라던 다산 말씀을 떠올리며 짐을 꾸려 보룡재를 넘어 마이봉 을 마주한 지 한 달이 흘렀다. 서에서 동으로 횡단한 셈이다. 바다와 평야, 탁 트인 생활에서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생활이 적응이 쉽지 않으리란 생각과 달리 조금씩 정겹기 시작한다.

봄이라 하긴 쌀쌀한 산지지만 요즘은 바람 끝이 제법 훈훈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이곳은 아직도 열리는 닷새 장 에는 신비한 약초와 입 맞당기는 나물, 비린 것들이 좌판을 채우고 모처럼 읍내가 활기를 찾는다. 순박한 사람들의 때 묻지 않는 생활이 살갑다. 그러나 이곳은 호남 정맥.금남정맥이 시작되고 금강·섬진강의 발원지로써 산 태극 수 태극 형상을 갖춰 예부터 이곳이 편치 못하면 호남이 불행하다 하여 지명을 ‘鎭安’이라 하였다 하니 그 기(氣)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고”,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없다”하여 조정을 오싹하게 만들었던 혁신적 사상가로 호남을 오랫동안 반역의 고을로 찍히게 한 풍운아 정여립이 꿈을 키웠고 요절한 곳이고 보면 산 고을이지만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범상치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곳에서 공직의 흔적을 이어가고 있지만 부임해서 지금까지 산촌의 여유는 좀처럼 나지 않는다.

실용정부 출범과 함께 섬기는 치안. 행동하는 치안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통을 위해 사무실 벽을 허물고 머슴 같은 자세로 휴일과 출퇴근 개념을 바꾸고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의 강도 높은 추진이 단시간 내에 들불같이 일고 있는 것이 반증이다. 치안대책 협의회가 구성되고 법질서 확립을 위한 각종캠페인·실무회의·T/F운용·기능별 워크숍 등 명운을 걸다시피 총력을 쏟고 있으니 여유는 사치일 수밖에…. 이곳 주민들도 처음에는 이런 곳까지 이런 요란을 떨어야하는 생각과 달리 요즘에는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있다.

모든 대·소 행사장, 면 단위 경로당, 학교 심지어 혼인귀화 외국인 등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서장부터 먼저 찾아가 법질서 확립 원년의 해로 만들기 위한 경찰의 노력, 계획 등을 설명·설득하고 있으니 당연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위상에 걸맞지 않은 이런 모습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왜 유독 법질서를 우습게 봐 대외적으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하는지 모두 반성해볼 일이다.

이런 와중에 어린이 납치 살해 사건을 비롯한 비슷한 폭행납치미수사건 발생에 따른 어처구니없는 경찰 대응으로 여론의 질타 대상이 되고 보니 여간 맥 풀리고 힘 빠지지는 것은 둘째치고 얼굴을 들 수 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다고 마냥 자조할 수 없는 일 어차피 시대적 소명이요 당위로써 피할 수 없는 잔이라면 지금의 잘못은 쓴 약의 처방전으로 생각하고 계속 일진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우화를 꺼내 놓고 가끔은 성찰의 숨을 고를 필요도 있다.
춘추시대 정(鄭)나라에 살던 한 촌부가 장날에 신발을 사기 위해 노끈으로 자신의 발을 재고 집을 나섰다. 시장 신발가게에 당도하여 막상 신발을 사려고 보니 발을 쟀던 노끈을 집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아차하며 다시 집에 돌아가 노끈을 찾아 신발가게에 와보니 이미 가게는 철시했고 신발은 사지 못했다는 한비자(韓非子)에 소개된 “정나라 사람 신발 사려하다”의 ‘鄭人買履’라는 우화다.
신발을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발이다. 신발가게에서 직접 신어보면 될 일임에도 끈으로 자신의 발을 쟀던 행위에만 매달려 일을 그르친 것이다.
치수를 잰 끈은 믿고 발은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 즉 근본을 잊고 말단에 빠진 꼴을 빗댄 것이다.

자신의 지향점이나 추구하는 가치의 형식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현실의 현상을 제대로 포착지 못한 비 융통성 행동이라 할까…. 법질서 준수는 민주시민의 첫 계명이요 도덕적 의무다 사소한 것마저 지나치게 법으로 규제하거나 처벌로 다스리는 것은 자칫 말단에 빠지는 우를 범할 수 있는 취약점이 있다.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이나 이런 도덕적 의무로써 법을 지켜야 할 국민들 모두 불요불급한 원칙에만 매달려 무언가에 쫓겨 서두르거나 지나치게 긴장 하다 보면 정나라 사람과 같은 우를 범할 수밖에 없다.
신발 사는데 는 노끈보다 맨발이 훨씬 나은 법이다. 이것이 진정한 실용이다.

박철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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